오세훈은 경기도 화성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서 26년째 일한다. 현장 작업자로 입사해 반장, 조장, 생산관리 사원을 거쳐 현재는 생산관리팀장이다.
회사에는 80명 정도가 근무한다. 세훈 아래에는 사무직 4명과 현장 반장 3명이 있고, 위에는 공장장과 대표가 있다. 현장 사람들에게는 관리자이고, 경영진 앞에서는 여전히 지시받는 사람이다.
세후 실수령액은 월 470만 원 안팎이다. 아내와 대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과 함께 산다. 6억 원대 아파트 한 채가 있지만 주택담보대출 약 1억 4천만 원이 남아 있다.
그는 회사에서 자주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누구 편을 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어느 위치에 서든 완전히 중립일 수 없다.
세훈이 요즘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분노도, 불안도 아니다.
곤란함이다.
윗사람의 요구가 왜 나오는지도 알고, 아랫사람이 왜 싫어하는지도 안다.
문제는 이해한다고 해서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 현재의 하루
오전 5시 46분
알람이 울린다.
세훈은 곧바로 끈다.
아내는 아직 자고 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업무용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새벽 4시 51분.
야간반 반장에게 메시지가 하나 와 있다.
3호기 또 센서 에러 떴습니다.
임시조치해서 돌리고 있는데 오전에 한번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세훈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나온다.
'또.'
지난달에도 같은 설비에서 문제가 났다.
설비팀은 부품 교체를 요청했다.
공장장은
“다음 달 예산에서 보자.”
고 했다.
세훈도 그때 크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당장은 돌아갔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생각한다.
'오늘 터지지만 마라.'
이미 문제가 생겼는데도 그는 먼저 원인을 해결할 생각보다 오늘 생산계획을 버틸 수 있을지부터 생각한다.
오전 6시 08분
샤워를 하고 나온다.
아내가 일어나 주방에서 물을 마신다.
“또 일찍 가?”
“기계 하나 이상하대.”
“당신 회사 기계는 맨날 이상해.”
세훈이 웃는다.
“오래됐으니까.”
아내가 냉장고를 연다.
“당신도 오래됐어.”
“나는 아직 쓸 만하지.”
둘이 웃는다.
아내가 계란을 꺼낸다.
“먹고 갈래?”
“회사 가서.”
실제로 회사에서는 커피와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을 가능성이 높다.
아내가 말한다.
“맨날 그러니까 속 버리지.”
세훈은 대답하지 않는다.
양말을 신는다.
오전 6시 31분
차에 탄다.
회사까지는 35분 정도 걸린다.
라디오에서는 경제 뉴스가 나온다.
제조업 경기 이야기가 들리자 볼륨을 조금 높인다.
전기차 부품 시장과 중국 업체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의 절반 정도만 듣는다.
세훈이 일하는 회사도 최근 수주가 줄었다.
대표는 두 달 전 회의에서 말했다.
“내년은 진짜 허리띠 졸라매야 합니다.”
세훈은 그 말을 들으면 구체적인 숫자보다 사람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연장근무가 줄면 불만이 나올 사람.
계약이 끝나는 외국인 근로자.
올해 정년을 앞둔 작업자.
그리고 자신.
'나는 괜찮겠지.'
생각한다.
곧이어
'뭘 괜찮아.'
라는 생각도 따라온다.
오전 7시 09분
공장에 도착한다.
야간반 반장 정대리가 세훈을 기다리고 있다.
“팀장님.”
“3호기?”
“네.”
둘이 바로 현장으로 간다.
기계는 돌아가고 있다.
정대리가 센서 부분을 가리킨다.
“리셋하고 지금은 되는데 밤에 세 번 멈췄습니다.”
세훈이 묻는다.
“불량은?”
“현재까진 괜찮습니다.”
“설비 불렀어?”
“어제 야간에는 사람 없어서요.”
세훈은 기계를 한동안 본다.
자기가 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관리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우선 직접 보고 싶어 한다.
세훈도 그렇다.
'봐야 감이 오지.'
실제로는 눈으로 본다고 고장의 원인을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다.
오전 7시 37분
생산계획 회의.
공장장, 품질팀장, 자재팀장과 앉는다.
공장장이 세훈에게 묻는다.
“오늘 A라인 8천 개 가능하죠?”
세훈이 잠시 멈춘다.
3호기 문제가 있다.
정상이라면 가능하다.
“설비가 조금 불안합니다.”
공장장이 말한다.
“그래도 납기는 오늘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일단 최대한 맞춰봅시다.”
이 말의 의미를 세훈은 안다.
맞추라는 뜻이다.
세훈이 대답한다.
“네.”
회의가 끝난다.
복도로 나오면서 품질팀장이 말한다.
“또 3호기야?”
“응.”
“아예 갈아야 되는 거 아니냐?”
“돈이 있어야 갈지.”
둘이 웃는다.
하지만 세훈은 웃으면서도 조금 짜증이 난다.
설비 교체를 미룬 결정에는 자신도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가 실제로 터지면 생산팀이 수습해야 한다.
오전 8시 12분
현장 조회.
작업자 20명 정도가 모여 있다.
세훈이 말한다.
“오늘 A품목 물량 조금 많습니다. 오후까지 상황 보고 필요하면 한 시간 정도 연장할 수도 있습니다.”
한 작업자가 바로 말한다.
“또요?”
세훈은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안다.
15년째 일한 박성철이다.
“확정은 아닙니다.”
성철이 말한다.
“요즘 맨날 확정 아니라면서 결국 하잖아요.”
몇 명이 작게 웃는다.
세훈도 웃으면서 말한다.
“나도 집 가고 싶어.”
성철이 대답한다.
“팀장님은 연봉제잖아요.”
분위기가 잠깐 묘해진다.
세훈은 웃음을 유지한다.
“연봉제라고 회사에서 자라고 하나.”
사람들이 웃는다.
조회가 끝난다.
세훈은 사무실로 돌아가며 생각한다.
'저 인간은 꼭 사람들 있을 때 저래.'
그러면서도 성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업자에게 연장근무는 자신의 시간을 회사에 더 파는 일이다.
세훈에게는 이미 급여에 포함된 시간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오전 8시 49분
책상에 앉기도 전에 전화가 온다.
구매팀이다.
“팀장님, B품목 원자재 오늘 오후 3시쯤 도착한답니다.”
세훈이 바로 말한다.
“3시면 오늘 생산 못 해.”
“업체에서 차가 늦는다는데요.”
“어제 오전에 온다며.”
“저희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세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그러면 어제부터 확인을 했어야죠.”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진다.
“업체에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다.
세훈은 잠시 뒤 자신의 말투를 떠올린다.
'괜히 저 직원한테 화냈나.'
원자재가 늦는 것이 그 직원 혼자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사과 전화를 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잠시 후 메신저로 보낸다.
가능하면 1시 전으로 당길 수 있는지 확인 부탁합니다.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자신에게는 이것도 작은 수습이다.
오전 9시 26분
3호기가 멈춘다.
현장에 경고음이 울린다.
작업자들이 익숙하게 움직인다.
세훈도 내려간다.
설비 담당자가 도착해 패널을 연다.
“센서 죽어가는 것 같은데요.”
세훈이 묻는다.
“오늘 버틸 수 있어?”
설비 담당자가 웃는다.
“그걸 제가 어떻게 장담해요.”
“그러니까 느낌상.”
“바꾸는 게 제일 낫죠.”
“재고 있어?”
“없습니다.”
세훈은 잠깐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면 왜 바꾸라고 해.”
설비 담당자가 대답한다.
“지난달에 구매 올렸는데 보류됐잖아요.”
세훈은 더 말하지 않는다.
그 보류 결재란에는 자신의 서명도 있었다.
오전 10시 03분
대표에게 전화가 온다.
“오 팀장.”
“네, 대표님.”
“오늘 물량 문제없죠?”
세훈은 1초 정도 망설인다.
“현재 설비 한 대가 조금 불안하긴 합니다.”
대표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또?”
“지금 조치 중입니다.”
“납기는?”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대표가 말한다.
“최대한 말고 맞춰야죠. 거래처 오늘 라인 섭니다.”
세훈의 손이 책상 위 볼펜을 만지작거린다.
“네.”
전화를 끊는다.
옆자리 대리가 눈치를 본다.
세훈이 중얼거린다.
“내가 기계를 낳았나.”
대리가 웃는다.
세훈도 웃는다.
화가 조금 풀린다.
오전 10시 38분
사무실에 현장 작업자 김영민이 찾아온다.
33세.
입사 3년 차다.
“팀장님, 잠깐 말씀 좀…”
세훈이 모니터를 보면서 대답한다.
“응, 말해.”
영민이 서 있다.
“저 다음 주 목요일 하루 연차 써도 될까요?”
세훈은 달력을 본다.
목요일은 출하가 많은 날이다.
“무슨 일인데?”
영민이 잠깐 멈춘다.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요.”
세훈은 그 표현이 오히려 궁금하다.
하지만 다시 묻지 않는다.
“목요일 사람이 좀 부족한데.”
영민이 말한다.
“꼭 써야 해서요.”
세훈이 한숨을 쉰다.
“일단 반장하고 조정해봐. 대체되면 써.”
“네.”
영민이 나간다.
세훈은 속으로 생각한다.
'요즘 애들은 이유도 말을 안 해.'
곧바로
'연차 쓰는데 이유까지 말해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부모 병원 정도는 되어야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냈다.
그것이 정상적이었던 것인지 단지 당시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던 것인지 요즘은 조금 헷갈린다.
오전 11시 21분
품질팀에서 불량품 사진을 보내온다.
3호기 생산품에서 치수 편차가 발견됐다.
세훈은 바로 현장으로 내려간다.
생산품 일부를 격리한다.
작업자인 최씨가 말한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말했잖아요.”
세훈이 묻는다.
“언제?”
“반장한테 아침에.”
반장이 끼어든다.
“그때는 측정 괜찮았습니다.”
최씨가 말한다.
“소리가 달랐다고 했잖아요.”
세훈은 짜증이 올라온다.
“지금 누구 잘못 찾을 때 아니고 일단 물량부터 확인합시다.”
최씨가 입을 다문다.
세훈은 조금 뒤 후회한다.
사실 지금이 원인을 찾을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산이 밀리는 순간에는 책임 소재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공격처럼 느껴진다.
오후 12시 14분
구내식당.
오늘 메뉴는 제육볶음이다.
세훈은 공장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다.
공장장이 묻는다.
“3호기 어떻대?”
“센서 갈아야 된답니다.”
“일단 오늘은 돌리고?”
세훈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불량 또 나오면 더 손해입니다.”
공장장이 조금 조용해진다.
“그러면 생산계획 어떻게 할 건데?”
“2호기로 물량 일부 넘겨야죠.”
“그럼 B품목이 밀리잖아.”
“원자재도 늦는다니까 그쪽은 어차피…”
둘이 숫자를 주고받는다.
옆자리 직원들은 말없이 밥을 먹는다.
세훈은 갑자기 자신이 회사 이야기만 하면서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밥이나 먹죠.”
공장장이 웃는다.
“우리가 언제 밥만 먹어봤어.”
세훈도 웃는다.
오후 1시 07분
딸 지수가 메시지를 보낸다.
아빠 이번 달 생활비 혹시 10만 원만 더 가능?
대학생 2학년이다.
세훈은 바로 답하지 않는다.
이번 달 카드값이 많이 나왔다.
딸에게 보내는 생활비는 월 55만 원.
기숙사비는 별도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다.
그런데 묻는 순간 딸이 설명해야 하고, 자신이 허락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5분 뒤 답한다.
왜 필요한데
지수:
과 모임이랑 책 좀 사서 생각보다 많이 씀
안되면 괜찮아
마지막 문장이 세훈을 조금 불편하게 한다.
‘안되면 괜찮아.’
마치 자신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가능성을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훈은 바로 송금한다.
10만 원.
보냈다 아껴써
지수:
감사감사 ❤️
세훈은 작은 하트를 보고 웃는다.
그러면서
'10만 원이 장난인가.'
라고 생각한다.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오후 1시 41분
원자재 업체에서 전화가 온다.
도착시간을 2시까지 앞당겼다고 한다.
세훈은 구매팀 직원에게 메신저를 보낸다.
확인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아침에 날카롭게 말한 것이 조금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직원에게서 답이 온다.
네 팀장님!
느낌표 하나에 세훈은
'뭐 별일 아니었네.'
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실제로 기분 나빴는지는 모른다.
오후 2시 26분
공장장이 다시 부른다.
“오 팀장, 다음 달부터 토요일 특근 좀 줄여야 될 것 같아.”
세훈은 예상했던 말이다.
“얼마나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세훈이 잠시 계산한다.
현장 작업자들은 특근수당 비중이 꽤 크다.
“사람들 반발 있을 겁니다.”
공장장이 말한다.
“물량이 없는데 어떻게 해.”
“알죠.”
“오 팀장이 잘 설명해.”
세훈은 그 문장을 싫어한다.
‘잘 설명해.’
결정은 위에서 하고 불만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공장장에게
“직접 설명하세요.”
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직책에 그런 역할이 포함돼 있다는 것도 안다.
오후 3시 18분
현장 휴게실에서 성철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세훈이 들어가자 말한다.
“오늘 연장합니까?”
“아직 보고 있어.”
성철이 웃는다.
“또 보고 있어.”
세훈도 웃는다.
“왜 그렇게 집을 가고 싶어. 형수님이 좋아해?”
“집 가고 싶은 거랑 마누라 보고 싶은 건 다른 문제지.”
주변 사람들이 웃는다.
세훈이 자판기 커피를 뽑는다.
성철이 목소리를 낮춘다.
“근데 요새 특근 줄인다는 얘기 있던데.”
세훈의 손이 잠깐 멈춘다.
벌써 소문이 났다.
“누가 그래?”
“다 돌던데.”
“확정된 거 없어.”
거짓말은 아니다.
공식 발표는 아직 안 됐다.
하지만 거의 결정됐다는 것을 안다.
성철이 말한다.
“줄이면 우리 타격 커요.”
세훈이 커피를 마신다.
“나도 알아.”
“팀장님이 좀 얘기해줘요.”
세훈은 짧게 대답한다.
“알았어.”
그 말을 하고 곧바로 부담을 느낀다.
무엇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오후 4시 02분
대표와 공장장의 회의에 들어간다.
내년도 인원계획 이야기다.
대표가 말한다.
“자연감소분은 당분간 충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갑시다.”
세훈이 묻는다.
“현장 두 명 빠지면 현재 물량 기준으로는 빠듯합니다.”
대표가 말한다.
“현재 물량도 줄잖아요.”
“다시 올라오면요?”
“그때 사람 뽑으면 되죠.”
세훈은 그 말이 현실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숙련 작업자는 몇 달 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더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내년도 물량이 정말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나면서 대표가 말한다.
“다들 살아남으려면 효율을 높여야 합니다.”
세훈은 복도로 나오면서 생각한다.
'‘다들’이라고 하면 누가 나가는 건데.'
오후 4시 47분
생산실적을 확인한다.
설비를 나눠 돌린 덕분에 오늘 납기는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세훈은 현장 반장에게 말한다.
“연장 없어도 되겠다.”
반장이 바로 웃는다.
“사람들 좋아하겠네요.”
“나는 안 좋아하냐?”
“팀장님은 퇴근해도 전화 받잖아요.”
세훈은 웃는다.
맞는 말이다.
오후 5시 24분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현장에 오늘 연장근무가 없다는 이야기가 퍼진다.
사람들의 표정이 확실히 밝아진다.
세훈은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 만족스럽다.
마치 자신이 일찍 보내준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생각한다.
'내가 보내준 것도 아닌데.'
물량이 맞았기 때문에 퇴근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철이 지나가며 말한다.
“팀장님, 오늘은 감사합니다.”
세훈이 대답한다.
“내가 뭘.”
그러면서 기분은 좋다.
오후 5시 51분
회사 주차장.
차를 타려는데 젊은 직원 영민이 다가온다.
“팀장님.”
“응.”
“아까 연차요.”
“응.”
“사실 여자친구랑 병원 좀 가야 해서요.”
세훈은 순간 표정을 관리한다.
“어디 많이 아파?”
영민이 조금 머뭇거린다.
“그건 아니고… 검사받는 게 있어서요.”
“그래. 반장하고 조정해서 가.”
“네. 감사합니다.”
영민이 떠난다.
세훈은 차에 타면서 생각한다.
'아까 그냥 보내줄걸.'
그리고 곧 다른 생각.
'근데 사람 없으면 누가 일해.'
둘 다 틀리지 않다.
오후 6시 37분
집에 도착한다.
아내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빨리 왔네.”
“원래 이 시간 퇴근이야.”
“원래가 언제였더라.”
아내가 웃는다.
세훈도 웃는다.
아들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민준아.”
“응.”
“학원 안 가?”
“오늘 없음.”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아들이 화면을 보며 대답한다.
“알아.”
세훈이 뭔가 더 말하려다 멈춘다.
회사에서도 하루 종일 사람에게 일을 시켰는데 집에 와서까지 관리자가 되는 것 같아 싫다.
소파에 앉는다.
3분쯤 뒤 다시 묻는다.
“공부는 했어?”
아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이따 한다고.”
세훈이 바로 말한다.
“말을 왜 그렇게 해.”
아내가 부엌에서 말한다.
“당신도 들어오자마자 공부 얘기하잖아.”
세훈은 입을 다문다.
자기는 단순히 물어봤다고 생각한다.
오후 7시 08분
저녁 식탁.
아들이 학교 이야기를 한다.
“우리 반 애 하나 담배 걸렸대.”
세훈이 바로 말한다.
“고등학생이 무슨 담배야.”
아들이 말한다.
“아빠 때는 안 피웠어?”
세훈은 밥을 씹는다.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얻어 몇 번 피운 적이 있다.
“나는 안 피웠지.”
완전히 사실은 아니다.
아내가 세훈을 본다.
젊을 때 이야기를 대충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아들이 말한다.
“다들 자기 때는 안 그랬다 그래.”
세훈이 웃는다.
“밥이나 먹어.”
오후 7시 46분
딸에게 전화가 온다.
“아빠.”
“왜.”
“돈 고마워.”
“아껴 써.”
“응. 근데 나 겨울방학 때 친구들이랑 대만 갈 수도 있어.”
세훈의 첫 반응은 계산이다.
항공료, 숙박비.
“돈은?”
딸이 웃는다.
“아직 간다고 확정도 안 했는데 돈부터 물어봐.”
“돈이 있어야 가지.”
“알바해서 모을 거야.”
세훈은 조금 마음이 놓인다.
그러면서도 딸이 자기 돈으로 여행 간다고 하니 이상하게 섭섭하다.
“모자라면 말해.”
아까는 아껴 쓰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낸다.
딸이 웃는다.
“역시 아빠.”
전화를 끊는다.
아내가 말한다.
“애한테 자꾸 돈 줘 버릇하지 마.”
세훈이 대답한다.
“지가 모은다잖아.”
“그러니까.”
“모자라면 조금 보태줄 수도 있지.”
아내가 웃는다.
“당신이 더 보내고 싶어 하잖아.”
세훈은 부정하지 않는다.
오후 8시 31분
아파트 단지를 걷는다.
건강검진에서 혈압과 허리둘레를 관리하라는 말을 들은 뒤 일주일에 세 번은 걸으려고 한다.
동네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한잔할래?”
세훈은 잠시 고민한다.
“오늘은 안 돼.”
“마누라가 못 나가게 해?”
“내가 안 나가는 거야.”
실제로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전화를 끊고 계속 걷는다.
조금 뿌듯하다.
10분 뒤 편의점에 들어가 캔맥주 두 개를 산다.
'걷고 한 캔은 괜찮지.'
오후 9시 17분
아내와 소파에서 TV를 본다.
맥주를 한 캔 연다.
아내가 말한다.
“그럴 거면 왜 걸었어?”
“걸었으니까 먹는 거지.”
“참 논리 좋다.”
세훈이 웃는다.
회사에서는 부하직원의 변명을 들으면 논리적으로 따진다.
자기 행동의 이유에는 꽤 관대하다.
오후 9시 43분
아내가 묻는다.
“회사 요즘 괜찮아?”
세훈의 손이 잠깐 멈춘다.
“왜?”
“요즘 당신 회사 얘기 많이 하잖아.”
“그냥 그렇지.”
“일 없다는 얘기도 했다며.”
“없다가도 생겨.”
아내가 세훈을 본다.
“당신 정년까지는 괜찮겠지?”
세훈은 바로 대답한다.
“내가 빠지면 공장 안 돌아가.”
농담처럼 말한다.
아내가 웃는다.
“그 정도야?”
“그럼.”
세훈도 웃는다.
하지만 광고가 나오는 동안 생각한다.
'진짜 내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할까.'
한 달?
한 주?
아마 며칠 지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할 것이다.
그 생각이 조금 싫다.
오후 10시 26분
샤워를 하고 나온다.
업무용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와 있다.
설비 담당자다.
3호기 센서 긴급구매 올렸습니다. 내일 오전 결재 부탁드립니다.
세훈이 답한다.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그냥 바로 사야지.'
가격은 180만 원 정도다.
지난달에는 비싸다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 생산 차질을 겪고 나니 싸게 느껴진다.
사람의 판단 기준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빠르게 달라진다.
오후 10시 51분
침대에 눕는다.
아내는 이미 자고 있다.
세훈은 휴대전화 메모에 내일 할 일을 적는다.
- 3호기 센서 결재
- 목요일 인원 조정
- 다음 달 특근계획
- A품목 실적 정리
세 번째 항목에서 손이 멈춘다.
다음 달 특근계획.
성철의 말이 떠오른다.
“줄이면 우리 타격 커요.”
공장장의 말도 떠오른다.
“물량이 없는데 어떻게 해.”
둘 다 맞다.
그런데 세훈이 해야 하는 일은 어느 쪽이 맞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실제 근무표를 만드는 것이다.
문득 젊었을 때 생각이 난다.
관리자들이 사무실에서 현장을 모른 채 마음대로 결정한다고 욕하던 시절.
자신은 지금 사무실에 앉아 있다.
하지만 자기는 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장 출신이잖아.'
그 생각이 위안이 된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 불편하다.
현장 출신이라는 사실이 지금도 현장의 편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후 11시 17분.
알람을 맞춘다.
내일도 5시 46분이다.
눈을 감는다.
2. 이 사람의 일생
유년기 — “눈치가 빠른 애”
오세훈은 1974년 충남 아산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금속가공공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몇 년간 전업으로 아이들을 돌보다 식당 일을 시작했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생활이 무너질 정도의 가난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으면 농담도 했지만 피곤한 날에는 가족이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지가 폭력적인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집안 분위기가 아버지의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세훈은 어린 나이부터 그것을 빨리 알아차렸다.
오늘은 용돈 이야기를 해도 되는 날인지.
오늘은 텔레비전 소리를 줄여야 하는 날인지.
어머니는 그런 세훈을 두고 말했다.
“쟤가 눈치는 제일 빨라.”
칭찬이었다.
세훈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형과 동생 사이
세 살 위의 형은 공부를 잘했다.
네 살 아래 여동생은 집안의 막내였다.
세훈은 둘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특별한 역할이 없었다.
그것이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형이 부모의 기대를 많이 받았고 동생은 부모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세훈은 비교적 자유롭게 밖에서 놀았다.
다만 집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중간 역할을 하는 일이 있었다.
형과 어머니가 싸우면 형에게
“그냥 네가 한번 참아.”
라고 했고,
동생이 아버지에게 혼나면
“다음부터 하지 마.”
라고 달랬다.
어느 쪽이 옳은지를 정하기보다 빨리 갈등이 끝나는 것이 좋았다.
학교생활
성적은 중간보다 조금 위였다.
특별한 과목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친구가 많았고 사람 사이를 조정하는 능력이 있었다.
두 친구가 싸우면 양쪽과 계속 어울릴 수 있었다.
친구들은 가끔 말했다.
“너는 누구 편이냐?”
세훈은 웃으면서
“나는 이기는 편.”
이라고 했다.
농담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자신의 생활방식이기도 했다.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을 잃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과 취업
대학 진학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시에도 전문대 정도는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형이 이미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바로 취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부모가 세훈에게 취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말했다.
“네가 알아서 해.”
세훈은 자동차 부품회사 생산직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합격했다.
스물한 살이었다.
세훈은 오랫동안
“나는 원래 대학에 별 생각이 없었다.”
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절반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형의 학비를 알고 있었고, 자신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면 부모가 부담스러워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부모는 세훈이 그런 생각까지 했는지는 모른다.
20대 초반 — 생산직 작업자
처음 몇 년은 현장에서 프레스와 조립 공정을 담당했다.
작업복은 항상 기름 냄새가 났다.
허리가 아팠고 손에는 작은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관리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사무실에서 내려와 생산량만 재촉하는 과장을 싫어했다.
작업자들이 말했다.
“저 사람은 기계가 왜 서는지도 몰라.”
세훈도 함께 욕했다.
“지가 한번 해보라 그래.”
그 시절 세훈에게 회사는 비교적 단순했다.
우리는 만드는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시키는 사람이다.
군 복무 이후 복직과 결혼
군 복무를 마친 뒤 같은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는 조금 커져 있었다.
스물여덟 살 때 지금의 아내 혜진을 만났다.
혜진은 당시 보험회사 사무직으로 일했다.
두 사람은 친구 소개로 만났다.
세훈이 혜진에게 끌렸던 이유 중 하나는 말이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고 말했다.
세훈에게는 자신과 다른 방식이었다.
연애 중에도 혜진이 말했다.
“당신은 의견 물어보면 맨날 아무거나래.”
세훈은 실제로 아무거나 괜찮다고 생각했다.
혜진은 말했다.
“아무거나도 계속되면 사람 짜증나.”
세훈은 그때 처음으로 의견을 양보하는 것이 항상 편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 배웠다.
30대 — 반장이 되다
근속이 길어지고 일을 잘 알게 되면서 반장을 맡았다.
월급도 조금 올랐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작업자 시절과 전혀 다른 문제가 생겼다.
윗사람이 말했다.
“오늘 천 개 더 뽑아.”
현장에서는 말했다.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해.”
예전에는 함께 욕하면 됐다.
이제는 자신이 답해야 했다.
처음 몇 달 동안 세훈은 작업자 편을 많이 들었다.
“이건 무리입니다.”
라고 윗사람에게 말했다.
현장 사람들에게는 좋은 반장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생산목표가 계속 미달하자 당시 부장이 불렀다.
“오 반장, 네가 근로자 대표야?”
세훈은 기분이 나빴다.
부장이 이어서 말했다.
“사람들 마음 이해하는 거랑 회사 목표 맞추는 건 다른 문제야.”
당시에는 전형적인 관리자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신도 비슷한 말을 할 때가 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다
첫째 지수가 태어나고 3년 뒤 아들 민준이 태어났다.
세훈은 아이들에게 권위적인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아버지가 무서웠던 것은 아니지만 집안 전체가 아버지 기분을 살피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농담도 많이 했다.
용돈도 비교적 넉넉하게 주었다.
하지만 성적 문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달라졌다.
특히 아이가
“공부하기 싫다.”
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에게는 대학 진학 선택지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하고 싶어도 못 했어.”
라는 말을 몇 번 했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못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 속에서는 포기해야 했던 선택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30대 후반 — 사무직으로 이동하다
회사가 ERP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현장 경험이 있는 생산관리 인력이 필요해졌다.
세훈이 추천됐다.
처음에는 싫었다.
“나는 컴퓨터 잘 못합니다.”
라고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교육을 해줬고 급여와 승진 가능성도 더 좋았다.
결국 받아들였다.
처음 사무실에 자기 책상이 생겼던 날이 기억난다.
현장 사람 몇 명이 농담했다.
“오 반장 이제 우리랑 다른 사람이네.”
세훈은 웃으며 말했다.
“똑같지 뭘.”
하지만 실제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여름에 덜 더웠다.
겨울에 덜 추웠다.
작업복 대신 셔츠를 입었다.
몸은 덜 힘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보고 있는 숫자가 달라졌다.
작업자일 때는 오늘 자신의 공정이 중요했다.
생산관리에서는 공장 전체의 생산량, 재고, 납기, 인건비를 봐야 했다.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관리자들의 결정이 왜 나왔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현장 사람들은 세훈에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기 시작했다.
40대 — 관리자의 세계
팀장이 되면서 더 어려워졌다.
결정권이 생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한적이었다.
연차를 조정할 수 있었다.
근무표를 만들 수 있었다.
작업자를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원 충원과 큰 설비투자, 급여, 수주는 자신이 결정하지 못했다.
위에서 정한 조건 안에서 아래의 불만을 조절해야 했다.
세훈은 처음에는 이 역할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양쪽 사정을 모두 아니까 자신이 중간에서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됐다.
중간에 있다는 것은 양쪽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양쪽 모두에게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영진에게는
“현장 편을 너무 든다.”
는 말을 들었다.
현장에서는
“이제 완전히 회사 사람이 됐다.”
는 말도 들었다.
둘 다 듣기 싫었다.
한 번의 인원 감축
46세 때 회사가 큰 수주 하나를 잃었다.
계약직과 일부 장기근속 직원에 대한 희망퇴직이 시행됐다.
세훈은 대상자 면담에 참여해야 했다.
그중 한 명은 세훈이 현장 작업자이던 시절부터 같이 일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너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세훈은
“제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뒤 그 문장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책임이 없다는 뜻인가.
자신도 잘 몰랐다.
몇 달 뒤 그 사람에게 연락하려다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현재까지도 연락하지 않는다.
50대 — 아래보다 위가 가까워지고, 위보다 아래를 더 오래 알게 된 나이
현재 회사에서 세훈보다 오래 일한 사람은 많지 않다.
대표도 중간에 바뀌었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세훈은 회사 역사까지 설명할 수 있다.
현장 작업자들과 술을 마시면 옛날 이야기를 한다.
경영진 회의에서는 비용과 생산성을 이야기한다.
두 세계를 모두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제로 강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다.
젊은 작업자들에게는 ‘회사 사람’이고,
대표에게는 ‘오래된 직원’이다.
세훈 자신은 여전히
“나는 현장 사람이지.”
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하루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낸다.
3. 현재 심리와 일생의 연결
왜 세훈은 항상 “둘 다 이해된다”고 생각할까?
세훈의 인생에서 중간 위치는 낯설지 않다.
가족에서도 둘째였고, 친구들의 갈등에서도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직장에서는 그 성향이 실제 능력이 됐다.
현장의 언어와 경영진의 언어를 모두 어느 정도 이해한다.
작업자가
“특근이 줄면 월급이 줄어요.”
라고 하면 그것이 생활비 문제라는 것을 안다.
경영진이
“물량도 없는데 특근비를 어떻게 줍니까.”
라고 하면 그것도 이해한다.
문제는 이해가 결정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근무표에 숫자를 적어야 한다.
그때 중립은 끝난다.
세훈이 자주 느끼는 곤란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왜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말하기보다 상황 설명을 많이 할까?
세훈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공정하려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책임을 분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회사가 어렵다.”
“물량이 없다.”
“윗선 결정이다.”
이런 문장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나는 이 결정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또는
“나는 반대했지만 결국 실행하겠다.”
라는 자기 입장을 흐리게 만든다.
세훈은 자신을 비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중요한 순간에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입장을 취하면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을 평생 잘 알고 살아왔다.
왜 젊은 직원의 연차 이유가 궁금했을까?
세훈에게 휴가는 오랫동안 설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아프거나,
아이 행사가 있거나,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쓰는 것으로 배웠다.
젊은 직원에게 연차는 조금 다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는 권리에 가깝다.
세훈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라고 물은 뒤 스스로도
'굳이 알아야 하나.'
생각했다.
세대차이는 단순히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린 문제가 아니다.
각 세대가 직장을 자신과 어떤 관계로 생각하며 살아왔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훈에게 회사는 생계뿐 아니라 삶의 상당 부분이었다.
젊은 직원에게는 여러 삶의 영역 중 하나일 수 있다.
왜 자신이 작업자였던 시절을 중요한 정체성으로 붙잡고 있을까?
“나는 현장을 알아.”
세훈에게 매우 중요한 문장이다.
그 말 덕분에 자신이 숫자만 보는 관리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장 경험은 큰 장점이다.
기계가 멈췄을 때 작업자가 왜 짜증을 내는지도 안다.
연장근무 한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도 경험해봤다.
하지만 과거에 현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현재의 모든 판단을 자동으로 현장 친화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소득도,
근무환경도,
결정권도,
책임도 달라졌다.
세훈은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얼마나 변했는지는 실제보다 적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 딸에게 돈을 아껴 쓰라고 하면서 자신이 먼저 더 보태주려고 할까?
세훈은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동시에 자신이 제공할 수 있을 때 제공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특히 자신이 젊을 때는 부모에게 큰 경제적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딸이 자신보다 선택지가 많은 삶을 사는 것이 기쁘다.
그 선택지를 어느 정도 자신이 만들어줬다는 사실도 뿌듯하다.
그러면서
“요즘 애들은 돈을 쉽게 쓴다.”
고 말할 때도 있다.
자녀에게 절약을 가르치려는 마음과 자신이 줄 수 있는 아버지이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아껴 쓰라고 말한 직후 여행비가 모자라면 보태겠다고 한다.
왜 아들에게는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을 쉽게 요구할까?
세훈은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모든 힘을 쏟은 학생이 아니었다.
담배도 몇 번 피워봤고 친구들과 놀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라고 한다.
세훈에게 이것은 위선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본 뒤 어떤 선택이 더 유리한지 알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 대부분은 과거의 자신을 그대로 자녀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녀 입장에서는
“아빠도 안 했으면서 왜 나한테 하라고 해?”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세훈은 자신의 과거를 거짓말하려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자녀에게 교훈을 전달할 때 과거의 불완전했던 자신보다 현재의 판단을 더 앞세운다.
왜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농담할까?
세훈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회사는 자신이 없어도 돌아갈 것이다.
처음에는 매우 불편하겠지만 결국 누군가가 일을 나눠 맡을 것이다.
그런데 26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했다.
자신이 청년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상당 부분이 회사와 연결되어 있다.
그 조직에서 자신이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직업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지난 26년 동안 쌓아온 것이 실제로 얼마나 남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농담을 한다.
농담 안에는 어느 정도 진짜 바람도 있다.
왜 과거 동료의 “너까지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을 아직 기억할까?
세훈은 그 사람을 해고하지 않았다.
회사가 결정했다.
따라서
“내가 결정한 게 아니다.”
라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결정이 집행되는 과정의 일부였다.
이 차이가 세훈을 불편하게 한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평가할 때 내가 얼마나 선택할 수 있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훈은 선택권이 적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게는 세훈이 회사 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만 보였을 수 있다.
둘 중 하나만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조직 안에서는 이렇게 개인의 책임과 구조의 책임이 겹치는 순간이 생긴다.
세훈은 아직 그 일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다.
세훈의 가장 큰 자기모순
세훈은 스스로를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적으로 어느 편을 드는 것보다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게 한다.
하지만 상황을 많이 이해할수록 결정을 미루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다.
한쪽 주장만 들으면 선택이 쉽다.
양쪽 사정을 모두 알면 선택 하나가 누구에게 어떤 손실을 줄지도 보인다.
그래서 세훈은 가끔 자신이 젊었을 때보다 더 현명해졌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예전보다 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젊은 작업자였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잖아.”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회사 사정도 있으니까.”
그것이 단순히 타협한 결과만은 아니다.
실제로 보이는 것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늘어날수록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능숙해질 위험도 있다.
세훈 자신도 그 경계를 정확히 모른다.
아마 사람은 권력을 가지면 어느 순간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더 많은 사정을 이해하게 되고, 조금씩 이전에는 용납하지 않았던 선택을 합리적으로 느끼게 되면서 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훈은 여전히 자신이 옛날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장 작업자들이 보는 세훈은 조금 다를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도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4. 이 사람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기
1. 세훈이 당신의 상사라면 당신은 그를 ‘회사 편만 드는 관리자’라고 생각했을까?
세훈이 실제로 작업자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사실과, 결국 회사가 원하는 근무표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과 상대의 편에 선다는 것은 얼마나 다른 일일까?
2. 당신이 권한이 거의 없었다는 이유로 불편한 결정의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세훈은 인원 감축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을 집행했다. 조직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최고 결정권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시켰다”와 “내가 선택했다” 사이에서 개인의 책임은 어디부터 시작될까?
3. 당신이 지금 비판하는 위치에 20년 뒤 직접 올라간다면 정말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세훈 역시 젊었을 때 생산량만 재촉하는 관리자를 비판했다. 지금 그는 예전 관리자의 논리를 상당 부분 이해한다. 이것은 그가 타락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현실을 이제 보게 됐다는 뜻일 수도 있다. 당신이라면 두 가능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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