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원은 경남 남해의 한 면 지역에 산다. 전교생이 120명 남짓한 중학교 2학년이다. 아버지는 멸치 가공업체에서 냉동·출하 일을 하고, 어머니는 관광철에는 펜션 객실 청소를 하며 비수기에는 지역 농산물 포장 일을 한다.
채원에게는 일곱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집은 부모가 10여 년 전 대출을 끼고 산 오래된 단독주택이고, 가정형편은 빠듯하지만 심각하게 궁핍하지는 않다.
채원은 어른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듣는다.
“채원이는 진짜 손이 안 가.”
채원도 대체로 그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가끔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
1. 현재의 하루
오전 6시 21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뜬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어머니가 이미 일어난 것 같다.
채원은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단체 채팅방 메시지가 37개 쌓여 있다.
친구들이 밤늦게까지 이야기한 흔적이다.
마지막 메시지는 새벽 1시 08분.
민주: 아 근데 서연이 걔 진짜 삐진 거 맞는 듯
하늘: 걍 냅둬
민주: 채원이는 또 자냐ㅋㅋ
채원은 화면을 몇 초 본다.
답장하지 않는다.
'내가 왜 맨날 밤 1시까지 있어야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 채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는다.
서연이가 왜 삐졌는지도 대충 파악한다.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오전 6시 37분
부엌으로 나온다.
어머니가 김밥 비슷하게 밥과 계란을 김에 싸고 있다.
“일어났어?”
“응.”
“동생 좀 깨워줘.”
채원은 대답하지 않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낸다.
어머니가 다시 말한다.
“채원아.”
“알았어.”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다.
어머니가 쳐다본다.
“아침부터 왜 짜증이야?”
“짜증 안 냈는데.”
정말로 자신은 짜증을 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아직 잠이 덜 깼을 뿐이다.
남동생 방에 들어간다.
“이도윤. 일어나.”
동생이 움직이지 않는다.
“일어나라고.”
“싫어.”
채원은 이불을 걷는다.
“엄마가 깨우래.”
“누나가 하지 마.”
채원은 순간 화가 난다.
“그럼 네가 혼자 일어나든가.”
방을 나온다.
30초쯤 지나 다시 들어간다.
“야, 7시 되면 진짜 늦어.”
동생의 등을 두 번 두드린다.
귀찮다.
그런데 동생이 정말 늦어서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도 보기 싫다.
오전 6시 58분
네 사람이 같이 아침을 먹는다.
아버지는 작업복을 입고 있다.
어머니가 말한다.
“오늘 비 온다던데 우산 챙겨.”
채원은 휴대전화 날씨를 확인한다.
“오후에 30퍼센트인데.”
“그래도 챙겨.”
“학교에 우산 있어.”
아버지가 밥을 먹다가 말한다.
“엄마 말 그냥 들어. 우산 하나 드는 게 뭐 힘들다고.”
채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우산을 챙긴다.
현관을 나가며 생각한다.
'비 안 오면 괜히 들고 다녀야 되잖아.'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침부터 설명하다 싸우는 것이 더 귀찮다.
오전 7시 31분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간다.
마을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길 건너편에서 이웃 할머니가 밭에 나와 있다.
“채원아, 학교 가나?”
“네.”
“공부 잘하고.”
“네.”
학교 가는 아이에게 왜 항상 공부 잘하라고 하는지 궁금하다.
한번
“놀다 올게요.”
라고 답해볼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싫은 것은 아니다.
굳이 어른을 당황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전 7시 47분
버스에 탄다.
같은 반 민주가 뒤쪽에서 손을 흔든다.
“야, 여기.”
채원이 옆에 앉는다.
민주가 바로 묻는다.
“어제 톡 봤지?”
“아침에.”
“서연이 개삐졌잖아.”
“왜?”
“너 다 읽었다며.”
“아니, 대충.”
사실 거의 다 읽었다.
민주가 설명한다.
어제 네 명이 주말에 카페에 가기로 했는데 서연이에게는 말을 늦게 했고, 서연이가 자신만 빼고 약속을 잡았다며 화가 난 이야기다.
민주가 말한다.
“근데 걔가 먼저 토요일 안 된다고 했거든?”
채원은 잠시 생각한다.
“그래도 자기 빼고 얘기한 것처럼 느꼈나 보지.”
민주가 채원을 본다.
“너 서연이 편이야?”
“아니.”
“근데 왜 걔 편들어.”
“편든 게 아니라.”
채원은 설명하려다가 그만둔다.
민주가 창밖을 보며 말한다.
“너는 항상 애매하게 말한다.”
채원은 그 말이 조금 기분 나쁘다.
자기는 애매한 게 아니라 양쪽 말이 다 조금씩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전 8시 23분
교실.
담임이 출석을 부르기 전까지 아이들이 시끄럽다.
서연은 뒷자리에서 이어폰을 만지고 있다.
민주가 채원에게 속삭인다.
“봐봐. 삐졌잖아.”
채원이 서연을 본다.
서연과 눈이 마주친다.
서연이 먼저 시선을 돌린다.
채원은 순간 메시지를 보내려 한다.
너 왜 그래?
쓰다가 지운다.
어제 애들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또 지운다.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다.
'괜히 내가 끼어들면 더 이상해져.'
그렇게 결론 내린다.
그런데 1교시 내내 두 번 정도 서연 쪽을 본다.
오전 9시 42분
국어시간.
교사가 수행평가 조를 정한다.
네 명씩이다.
채원은 민주, 서연, 다른 남학생과 같은 조가 된다.
민주가 작게 말한다.
“와, 망했다.”
서연은 들었지만 모른 척한다.
채원은 민주를 팔꿈치로 살짝 친다.
“왜.”
“그냥.”
조별 주제를 고르는 시간이 된다.
민주와 서연은 서로 먼저 말하지 않는다.
채원이 말한다.
“우리 지역 관광 문제 하면 안 돼?”
남학생이 바로 말한다.
“난 상관없어.”
민주도 말한다.
“나도.”
서연이 말한다.
“그래.”
5분 정도 지나자 어색함은 조금 줄어든다.
자료 조사 역할을 나누면서 서연이 채원에게 말한다.
“너 PPT 할래?”
“응.”
“너 잘하잖아.”
별말 아닌데 채원은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근데 왜 나는 맨날 PPT야.'
오전 11시 16분
수학시간.
채원은 문제를 거의 다 풀었다.
선생님이 교실을 돌다가 채원의 공책을 본다.
“채원이는 역시 알아서 잘한다.”
채원은 웃는다.
“네.”
선생님이 지나간다.
앞자리의 현수가 뒤돌아본다.
“부럽다. 너네 부모님은 공부하라고 안 하지?”
“별로.”
“개부럽네.”
채원은 대답한다.
“공부하라고 하긴 해.”
“근데 너는 알아서 하잖아.”
채원은 샤프를 돌린다.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상하다.
사실 어제 수학 숙제를 하기 싫어서 40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결국 한 것은 맞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모두가 자신에게
“너는 원래 알아서 하잖아.”
라고 말할수록 무언가를 안 해도 되는 여지가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오후 12시 28분
급식시간.
민주와 하늘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서연이 혼자 다른 쪽에 앉으려 한다.
채원이 순간 고민한다.
“서연아.”
서연이 돌아본다.
“여기 앉아.”
민주가 채원을 잠깐 본다.
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앉는다.
처음 2분은 거의 말이 없다.
하늘이 갑자기 말한다.
“야 오늘 돈가스 개작다.”
민주가 웃는다.
“너는 맨날 밥 얘기밖에 안 해.”
서연도 조금 웃는다.
채원은 긴장이 풀린다.
속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아무 일 아닌 걸 왜 어제부터 저렇게 했지.'
그러다가 자신도 어젯밤 채팅을 모두 읽고 오늘 아침부터 신경 썼다는 사실은 잊는다.
오후 1시 17분
급식 후 화장실.
서연이 채원에게 묻는다.
“너 어제 애들이랑 나 빼고 얘기했어?”
“나는 그냥 잤는데.”
정확히는 약속 이야기가 나온 시간에는 이미 자고 있었다.
서연이 말한다.
“민주는 내가 예민한 것처럼 말하지?”
채원은 대답하기 어렵다.
“그런 건 아닌데.”
“말했네.”
“아니, 네가 토요일 안 된다고 했다고.”
서연이 표정을 굳힌다.
채원은 갑자기 짜증이 난다.
'왜 나한테 물어봐놓고 원하는 답 아니면 화내.'
“그냥 민주한테 직접 물어봐.”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진다.
서연이 말한다.
“됐어.”
서연이 먼저 나간다.
채원은 손을 씻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러나 교실로 돌아가는 동안 마음이 불편하다.
오후 2시 39분
체육시간.
배드민턴을 한다.
채원은 공부보다 운동을 훨씬 못한다.
셔틀콕을 세 번 연속 헛친다.
파트너가 웃는다.
“야 너 운동 진짜 못한다.”
채원도 웃는다.
“알아.”
이번에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다.
이상하게도 운동을 못한다는 말은 편하다.
누구도 채원에게 운동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시도에도 실패하자 채원은 크게 웃는다.
평소보다 목소리도 커진다.
친구들이
“채원이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봄.”
이라고 한다.
채원은 더 웃는다.
오후 4시 06분
수업이 끝난다.
민주가 묻는다.
“편의점 갈래?”
“나 동생 데리러 가야 돼.”
“또?”
“응.”
“너네 엄마가 가면 안 돼?”
“오늘 일해.”
민주가 별 의미 없이 말한다.
“너 진짜 엄마다 엄마.”
채원이 웃는다.
“꺼져.”
둘 다 농담으로 넘긴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나서 그 말이 다시 생각난다.
'내가 뭘 엄마야.'
동생을 데리러 가는 것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다.
밥을 매일 차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노래방에 가거나 카페에 갈 때 자신은 시간을 먼저 계산한다.
그것이 아주 부당한 일은 아니다.
부모가 일하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오늘은 싫어.”
라고 해보고 싶다.
오후 4시 48분
지역아동센터 앞.
초등학교 1학년인 도윤이 뛰어나온다.
“누나!”
학교에서는 동생 이야기가 귀찮았는데 얼굴을 보니 반갑다.
“가방.”
도윤이 가방을 바로 넘긴다.
“네가 들어.”
“무거워.”
“내 가방도 무거워.”
“누나는 크잖아.”
채원이 한숨을 쉬고 결국 둘 다 든다.
“아이스크림 사줘.”
“돈 없어.”
“엄마 카드 있잖아.”
“그건 아무거나 쓰는 거 아니야.”
“엄마는 사주는데.”
채원이 멈춘다.
“그럼 엄마 올 때 사달라고 해.”
도윤이 입을 삐죽인다.
편의점 앞을 지나는데 도윤이 계속 안을 본다.
채원은 결국 들어간다.
“하나만 골라.”
“누나도 먹어?”
“나는 안 먹어.”
결제하면서 자기 것도 하나 집는다.
도윤이 말한다.
“돈 없다며.”
채원이 노려본다.
“먹기 싫으면 너 것도 놓고.”
도윤이 웃는다.
오후 5시 21분
집.
도윤에게 손부터 씻으라고 한다.
채원은 교복을 갈아입고 소파에 눕는다.
휴대전화에 민주에게서 메시지가 온다.
서연이랑 얘기함
걍 지가 오해한거였음ㅋㅋ
채원이 답한다.
ㅇㅇ
민주:
너 아까 왜 걔 불렀냐 ㅋㅋ
채원은 잠시 생각한다.
혼자 앉길래
착한척 ㅋㅋ
채원은 그 말을 보고 표정이 굳는다.
장난인 것은 안다.
답장을 쓴다.
응 나 천사임
민주:
ㅋㅋㅋㅋㅋㅋㅋ
대화는 끝난다.
그런데 채원은 5분 정도 '착한 척'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내가 뭘 착한 척했는데.'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근데 왜 불렀지?'
서연이 혼자 있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서연이 불쌍해서였을 수도 있고,
점심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이 싫어서였을 수도 있고,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지기 싫어서였을 수도 있다.
채원은 굳이 하나를 고르지 않는다.
오후 5시 52분
도윤이 거실에서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누나 이거 해줘.”
“나 숙제해야 돼.”
“이것만.”
“안 돼.”
도윤이 계속 부른다.
“누나.”
“왜.”
“누나.”
“왜!”
목소리가 커진다.
도윤의 얼굴이 굳는다.
채원이 바로 후회하지만 사과하지 않는다.
“혼자 좀 해.”
도윤은 장난감을 들고 방으로 간다.
채원은 수학책을 펼친다.
그런데 문제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10분 뒤 도윤 방에 간다.
“뭐 해달라고 했는데?”
“됐어.”
“줘봐.”
“됐다고.”
채원도 갑자기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
방을 나온다.
다시 5분 뒤 들어간다.
“진짜 안 해?”
도윤이 장난감을 건넨다.
둘 다 아까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후 6시 34분
어머니가 돌아온다.
얼굴이 지쳐 보인다.
현관에서 말한다.
“아이고, 죽겠다.”
채원이 묻는다.
“오늘 많이 했어?”
“객실 여섯 개.”
“아빠는?”
“좀 늦는대.”
어머니가 냉장고를 열며 말한다.
“도윤이 저녁 뭐 먹일까.”
채원이 대답한다.
“나 라면 먹고 싶은데.”
“애한테 라면 먹이게?”
“그럼 내가 뭐 해?”
어머니가 잠깐 멈춘다.
“아니다. 엄마가 할게.”
그 말투가 피곤하게 들린다.
채원은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계란볶음밥 할게.”
“됐어.”
“아니, 할 수 있어.”
채원은 밥을 꺼낸다.
볶음밥을 만들면서 조금 화도 난다.
'나는 그냥 라면 먹고 싶다고 한 건데.'
아무도 채원에게 볶음밥을 하라고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있다.
그래서 더 억울하다.
오후 7시 11분
세 사람이 밥을 먹는다.
어머니가 한 숟가락 먹고 말한다.
“맛있네.”
도윤도 말한다.
“누나가 엄마보다 잘해.”
어머니가 웃는다.
“그럼 이제 누나가 매일 해라.”
채원은 바로 말한다.
“싫어.”
세 사람 모두 웃는다.
채원도 웃는다.
하지만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서
‘매일’
이라는 단어가 잠깐 걸린다.
어머니가 말한다.
“우리 채원이 있어서 엄마가 산다.”
이번에는 채원이 대답하지 않는다.
기분은 좋다.
분명히 좋다.
그런데 아주 작게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 생각이 나온 자신에게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오후 7시 56분
아버지가 퇴근한다.
옷에서 비릿한 냄새가 난다.
도윤이
“아빠 냄새 나.”
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웃는다.
“돈 냄새다.”
채원도 웃는다.
아버지가 채원의 머리를 한번 만진다.
“오늘 공부 잘했어?”
“그냥.”
“채원이는 알아서 하니까.”
또 그 말이다.
채원이 순간 말한다.
“나도 알아서 안 할 수도 있는데.”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본다.
“뭐?”
채원이 바로 말을 바꾼다.
“아니야.”
아버지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화장실로 간다.
채원은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오후 8시 33분
방에서 수행평가 PPT를 만든다.
관광객 증가와 쓰레기 문제에 관한 자료를 찾는다.
디자인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조원 단체방에 초안을 올린다.
민주:
역시 채원신
현수:
개잘했음
서연:
예쁘다
채원은 화면을 보고 만족한다.
몇 분 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그냥 대충 만들었으면 애들이 뭐라고 했을까.'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민주가
“오늘 왜 이래?”
정도는 했을 수 있다.
채원은 파일의 글자 간격을 다시 고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오후 9시 26분
어머니가 문을 연다.
“채원아.”
“응.”
“엄마 내일도 좀 일찍 나가야 되는데 도윤이 아침 챙겨줄 수 있어?”
채원은 모니터를 본 채 말한다.
“응.”
어머니가 말한다.
“역시 우리 딸.”
문이 닫힌다.
5초쯤 뒤 채원의 손이 멈춘다.
갑자기 싫어진다.
왜 바로
“응.”
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내일 특별한 일정도 없다.
해줄 수 있다.
어머니가 힘든 것도 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싫어.”
라고 말하기는 더 이상하다.
채원은 PPT 창을 닫고 침대에 눕는다.
'그냥 해주면 되지.'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도 기분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는다.
오후 10시 07분
친구 하늘과 통화한다.
하늘이 묻는다.
“야, 너 내일 학교 끝나고 카페 갈래?”
채원이 바로 대답하려다가 멈춘다.
“잠깐만.”
달력을 볼 필요도 없는데 달력 앱을 연다.
어머니의 일정,
동생 센터 시간,
버스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갈 수 있을 듯.”
하늘이 말한다.
“넌 뭘 맨날 확인해.”
“버스 있나 봐야지.”
“나는 그냥 엄마한테 데리러 오라 하면 되는데.”
채원은 웃으며 말한다.
“공주네.”
하늘도 웃는다.
그런데 통화를 끝낸 뒤 조금 부럽다.
하늘의 집이 더 부자인 것도 아니다.
그냥 하늘은 부탁을 쉽게 한다.
채원에게는 그것이 이상하게 어렵다.
오후 10시 49분
씻고 나온다.
어머니가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다.
채원이 잠시 옆에 앉는다.
어머니가 말한다.
“왜 안 자?”
“그냥.”
잠시 같이 빨래를 갠다.
어머니가 채원의 교복 셔츠를 들고 말한다.
“이제 이것도 작아지려고 하네.”
“괜찮아.”
“2학기 지나면 하나 사야겠다.”
“안 사도 돼.”
“팔 짧잖아.”
“그냥 입으면 되지.”
어머니가 웃는다.
“너는 뭐 사준다 그래도 싫대.”
채원도 웃는다.
자신은 물건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며칠 전 인터넷에서 8만 원짜리 운동화를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세 번이나 봤다.
말하면 부모가 사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말하지 않는다.
'굳이.'
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거절당하는 것도 싫고,
부모가 가격을 보고 잠깐 망설이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오후 11시 18분
침대에 눕는다.
단체 채팅방이 다시 활발하다.
이번에는 서연도 이야기하고 있다.
아침의 갈등은 거의 없었던 일처럼 사라졌다.
채원은 채팅을 보면서 조금 웃는다.
민주:
채원 자냐
채원이 바로 쓴다.
안잠
민주:
웬일ㅋㅋ
채원:
나도 사람임
친구들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낸다.
별말 아닌데 채원은 그 문장을 다시 본다.
나도 사람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썼는지 생각하다가 금방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11시 43분.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내일 아침 동생에게 계란을 해줄지 시리얼을 줄지 생각한다.
그러다 갑자기 짜증이 난다.
'내가 왜 벌써 그걸 생각해.'
다시 생각한다.
'그냥 시리얼 주면 되지.'
눈을 감는다.
2. 이 사람의 일생
태어난 집
채원은 2012년 남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같은 지역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뒤 여러 생산·수산 관련 일을 거쳤고, 결혼 후에는 비교적 꾸준히 멸치 가공업체에서 일했다.
어머니는 결혼 전 식당과 마트에서 일했고, 채원이 어릴 때 몇 년간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다 다시 시간제 일을 시작했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채원이 어린 시절부터 돈 걱정에 시달린 것도 아니다.
먹고 싶은 과자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학용품이 필요하면 샀다.
대신 부모는 가격을 자주 비교했다.
무언가를 사러 가면 어머니는 말했다.
“비슷하면 싼 거 사.”
채원에게 돈은 공포라기보다 괜히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배웠다.
유치원 시절
채원은 낯선 곳에서 많이 우는 아이가 아니었다.
유치원 첫날에도 어머니가 떠날 때 잠깐 울고 금방 적응했다.
교사는 말했다.
“어머니, 채원이는 참 적응을 잘해요.”
어머니가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자랑했다.
“우리 애는 진짜 순해.”
채원은 그 말을 여러 번 들으며 자랐다.
순하다.
얌전하다.
말을 잘 듣는다.
혼자서도 잘한다.
칭찬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채원은 크게 떼를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타고난 기질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채원은 어려서부터 상대방의 반응을 꽤 빠르게 읽는 편이었다.
어머니가 바쁘면 장난감을 사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피곤해 보이면 놀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특별히 참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 순간에는 그냥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편했다.
남동생이 태어나다
채원이 일곱 살 때 도윤이 태어났다.
부모는 채원에게
“이제 네가 누나니까.”
라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는 일부러 채원도 챙기려고 했다.
동생 선물을 받으면 채원의 작은 선물도 함께 준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족의 시간은 달라졌다.
아기는 자주 울었고,
병원에 갔고,
잠을 자지 않았다.
채원은 혼자 TV를 보고,
혼자 옷을 입고,
혼자 준비하는 시간이 늘었다.
한 번은 어머니에게 그림을 보여주려고 갔다가 어머니가 우는 동생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돌아갔다.
그날 그림을 보여주지 못해서 크게 상처받은 것은 아니다.
몇 시간 뒤에는 자신도 잊었다.
이런 순간들이 오랫동안 반복됐다.
채원에게는 조금씩 하나의 생활방식이 만들어졌다.
급한 사람이 먼저다.
자신은 대부분 급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읽기와 글쓰기에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준비물을 잊어버리는 일도 드물었다.
교사는 생활기록에
‘자기주도적으로 학교생활을 잘함’
같은 표현을 썼다.
부모는 상담에 가면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채원이는 걱정할 게 없어요.”
부모에게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동생은 그 무렵 고집이 세고 활동량이 많았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돌아온 채원에게 종종 말했다.
“너는 어릴 때 진짜 편했는데 도윤이는 왜 이러냐.”
채원은 웃었다.
동생보다 자신이 더 나은 아이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손이 가지 않는 아이가 자신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됐다.
초등학교 4~5학년
부모의 경제활동 시간이 늘었다.
관광객이 많아지는 계절이면 어머니는 주말에도 일했다.
채원은 혼자 집에 있는 것을 크게 무서워하지 않았다.
간단한 라면이나 계란밥 정도는 만들었다.
도윤이 커지면서 짧은 시간 둘만 집에 있는 일도 생겼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동생에게
“엄마 없으니까 내가 대장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생이 말을 듣지 않으면 짜증이 났다.
한 번은 도윤이 현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채원이 세게 팔을 잡았다.
도윤이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와 상황을 듣고 말했다.
“네가 잘했다. 동생 나가면 큰일 나잖아.”
채원은 칭찬받았다.
그런데 자신이 동생 팔을 세게 잡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자신이 동생을 돌보는 것은 잘하는 일이자 해야 하는 일처럼 조금씩 굳어졌다.
친구 관계
채원은 친구가 적지는 않다.
하지만 친구 집단의 중심에 서는 편도 아니다.
친구들이 싸우면 양쪽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은 그런 채원을 성숙하다고 볼 수 있다.
친구들은 때때로 답답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누구 편인데?”
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채원은 이 질문 자체를 싫어한다.
사람이 싸웠다고 한쪽이 완전히 맞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조금 있다.
한쪽 편을 명확하게 선택하면 다른 한쪽과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
채원은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깨지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본인은 그것을 특별히 두려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피곤하잖아.”
라고 표현한다.
초등학교 6학년 — 처음으로 크게 화내다
6학년 때 어머니가 주말 근무를 나가면서 도윤을 봐달라고 했다.
채원은 친구들과 바닷가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그 약속을 몰랐다.
채원은 바로
“알았어.”
라고 했다.
친구들에게는
“집에 일이 생겼어.”
라고 취소했다.
오후에 친구들이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단체방에 올렸다.
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저녁에 돌아와
“우리 딸 덕분에 오늘 일했다.”
라고 했다.
그 순간 채원이 갑자기 울었다.
어머니는 놀랐다.
“왜 그래?”
채원이 말했다.
“왜 맨날 나한테 시켜?”
어머니도 당황해서 말했다.
“싫으면 싫다고 하지 그랬어.”
그 말이 채원을 더 화나게 했다.
“말하면 안 갈 거였어?”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는 어떻게 했을지 두 사람 모두 모른다.
그날 크게 싸우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했고 다음날 채원에게 용돈 2만 원을 줬다.
채원은 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울었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자신이 선택해서 해준 일과 사실상 선택할 수 없다고 느낀 일의 경계가 처음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중학교 입학
중학생이 되면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어졌다.
버스 시간에 맞춰 생활해야 했다.
도시 친구들처럼 학교가 끝난 뒤 자유롭게 여기저기 가기 어려웠다.
막차 시간,
부모의 퇴근,
동생의 일정.
무엇을 하든 작은 계산이 필요했다.
채원은 이런 생활을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다.
남해가 좋기도 하다.
사람이 적고,
바다가 가깝고,
어디를 가도 익숙하다.
서울에 가본 뒤에는
“난 저기서 못 살아.”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유튜브에서 서울 고등학생 브이로그를 보면 부럽다.
학교가 끝난 뒤 지하철을 타고 친구들과 돌아다니는 모습 때문이다.
자신은 도시로 가고 싶은 것인지,
그냥 선택지가 많은 생활을 원하는 것인지 아직 모른다.
공부
현재 반에서 성적은 상위권이다.
채원은 공부 자체를 아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한번 시작하면 제대로 하는 편이다.
특히 과제를 대충 제출하는 것이 어렵다.
90점을 받아도 크게 실망하지 않지만,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대충해서 90점을 받으면 화가 난다.
부모는 공부를 심하게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묘한 부담이 된다.
아버지는 말한다.
“네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채원은 이 말을 자유롭게 느끼면서도 가끔은 답답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물어봐도 부모가 답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은
“채원이 정도면 진주나 창원 쪽 좋은 고등학교도 생각해봐.”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동시에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고 싶기도 하고,
도윤과 부모를 놔두고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채원에게 집에 남으라고 한 적은 없다.
이 부담의 일부는 채원 자신이 만든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
부모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편이다.
채원은 어머니와 농담도 하고, 아버지에게 학교 이야기도 한다.
부모도 딸을 많이 믿는다.
바로 그래서 갈등이 애매하다.
명백하게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였다면 화내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부모는 실제로 고생하고 있다.
채원도 그것을 매일 본다.
어머니 손목이 아픈 것도 알고,
아버지가 여름이면 냉동창고와 바깥을 오가며 일하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도 힘들어.”
라고 말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비교가 시작된다.
'엄마보다 내가 힘든가?'
대부분 답은 아니라고 느낀다.
그러면 말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것을
“채원이는 별 고민이 없다.”
고 해석한다.
14세의 현재
채원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생활도 괜찮고,
가족관계도 괜찮고,
경제적으로도 기본적인 생활은 안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조금씩 새로운 욕구가 생기고 있다.
자기 시간을 자기가 정하고 싶다.
싫은 일을 싫다고 해보고 싶다.
별 이유 없이 부모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해보고 싶다.
친구에게
“나는 네 편이야.”
라고 말해보고 싶기도 하다.
동시에 그 모든 행동이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채원은 여전히 많은 일을 스스로 한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계속 말한다.
“채원이는 정말 어른스럽다.”
채원은 그 말이 아직 좋다.
다만 예전처럼 완전히 좋지만은 않다.
3. 현재 심리와 일생의 연결
왜 채원은 부탁을 받은 순간에는 “응”이라고 하고 나중에 화가 날까?
채원은 거절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부모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하고, 실제로 자신이 해줄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응”이라고 할 때 그 마음도 진짜다.
문제는 조금 뒤에 다른 욕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안 한다고 할 수도 있었나?”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느껴지지 않는 순간, 같은 행동도 부담이 된다.
누군가 강제로 시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손이 안 가는 아이’, ‘알아서 하는 아이’로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깨는 선택에는 작은 심리적 비용이 있다.
그래서 거절하지 않은 책임도 채원에게 어느 정도 있고, 동시에 주변이 채원의 순응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 부분도 있다.
어느 한쪽만의 문제는 아니다.
왜 “채원이는 알아서 잘한다”는 말이 칭찬인데도 답답할까?
그 말에는 신뢰가 들어 있다.
채원도 그것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신뢰가 반복되면 기대가 된다.
기대가 오래 지속되면 역할이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생긴다.
“내가 오늘은 못하면?”
채원은 실제로 숙제하기 싫은 날도 있고,
동생이 귀찮은 날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부모에게 투정 부리고 싶은 날도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의 머릿속에 이미 있는 ‘채원’이라는 이미지와 충돌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채원에게 완벽함을 강요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채원이 다른 사람의 기대를 미리 예상해서 스스로 행동을 조정하는 부분이 크다.
그래서 외부 압력과 자기압력을 명확히 나누기 어렵다.
왜 운동을 못한다는 말에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을까?
운동에서는 기대가 없다.
셔틀콕을 놓쳐도
“원래 못해.”
라고 웃을 수 있다.
실패가 자기 이미지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반면 공부와 과제에서는 다르다.
주변 사람들이 채원을 성실하고 잘하는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작은 실수도
‘이번에 못했다’보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일까?’라는 의미가 조금 더 붙는다.
채원은 아직 이것을 완벽주의 같은 말로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분야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된 영역에서만 기준이 높아지는 편이다.
왜 자신이 힘들다는 말을 부모에게 잘 하지 않을까?
채원은 부모의 피곤함을 구체적으로 본다.
어머니가 객실 여섯 개를 청소하고 돌아오는 모습,
아버지 작업복에서 나는 냄새,
부모가 생활비를 계산하는 대화를 안다.
그러면 자신의 피로를 말하기 전에 비교가 일어난다.
“이 정도를 힘들다고 해도 되나?”
그 결과 채원은 자신의 감정을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축소한다.
“괜찮아.”
“별거 없어.”
“할 수 있어.”
부모에게는 정말 편한 아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통이나 피로는 원래 경쟁이 아니다.
어머니가 더 피곤하다고 해서 채원의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채원은 아직 그 둘을 동시에 인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왜 친구들 싸움에서 한쪽 편을 잘 들지 않을까?
채원은 여러 관점을 볼 수 있는 편이다.
민주에게도 이유가 있고 서연에게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실제 장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한편을 선택하면 다른 사람과 갈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채원은 불편한 분위기를 오래 견디는 것을 싫어한다.
따라서 중립에는 공정성뿐 아니라 자신을 관계 갈등에서 보호하는 기능도 있다.
그런데 자신은 후자의 동기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가
“너는 항상 애매하게 말해.”
라고 하면 억울하다.
자기는 객관적인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둘 다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왜 서연에게 먼저 같이 밥을 먹자고 했을까?
친구를 챙기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동시에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상황을 자신이 견디기 싫었던 부분도 있다.
점심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도 싫었을 것이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착한 척’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도움 행동에는 대개 여러 동기가 섞여 있다.
상대가 걱정되는 마음과 내가 불편한 마음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서 한쪽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채원은 이런 복합적인 동기를 아직 언어로 설명할 만큼 자기분석적이지 않다.
그냥
“혼자 앉길래.”
라고 말한다.
그 정도가 오히려 현실적인 자기이해일 수 있다.
왜 원하는 운동화를 부모에게 말하지 않을까?
채원은 물욕이 없는 아이처럼 보인다.
실제로 소비욕이 강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원하는 물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운동화를 말하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섞여 있다.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한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주 작게는,
부모가 “너무 비싸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민망해지는 것을 피하고 싶다.
요구하지 않으면 거절당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부담도 주지 않는다.
자신도 철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많은 것이 동시에 해결된다.
그러나 그 대가로 부모는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점점 덜 알게 된다.
채원의 가장 중요한 자기모순
채원은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실제로 꽤 독립적이다.
혼자 준비하고,
일정을 관리하고,
동생을 챙기며,
과제를 수행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끔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거 네가 안 해도 돼.”
라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자기가 부탁을 거절해서 자유를 얻기보다는 상대가 먼저 부담을 거둬주기를 바란다.
자율성을 원하면서도 자율성을 직접 요구하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또 다른 모순도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주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왜 아무도 나를 걱정하지 않지?”
라는 기분이 생긴다.
하지만 누군가 걱정하며 이것저것 물으면
“괜찮다니까.”
라고 할 가능성도 높다.
이 모순들은 채원이 위선적이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서 유능하고 싶은 욕구와 돌봄받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14세의 채원은 아직 둘 중 어느 쪽도 완전히 선택할 필요가 없다.
아마 성장하면서 자신도 조금씩 알게 될 것이다.
‘혼자 할 수 있다’와 ‘혼자 해야 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4. 이 사람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기
1. 채원이 당신의 자녀라면, “알아서 잘하는 아이니까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실제로 믿어주는 것은 채원에게 중요한 자산이다. 그러나 유능한 아이도 도움을 필요로 할 수 있다. 상대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정말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2. 채원이 동생을 챙기면서 속으로 짜증을 내는 것을 본다면, 당신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을까?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가족을 돌보는 일이 귀찮은 것은 동시에 가능하다. 책임을 다하면서도 그 책임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는 것이 사랑의 부족을 뜻할까?
3. 당신도 주변에서 ‘원래 이런 사람’으로 믿어지는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지는 않을까?
성실한 사람, 착한 사람, 냉정한 사람, 강한 사람, 늘 해결해주는 사람이라는 평가는 처음에는 칭찬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어질 때, 당신은 실제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계속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될까?

'심리학 자료실 > 인간 심리 관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세훈, 52세, 남성, 중소 제조업체 생산관리팀장 (0) | 2026.09.02 |
|---|---|
| 배진아, 45세, 여성, 동네 미용실 원장 (1) | 2026.09.02 |
| 김소은, 28세, 여성, 장례지도사 (0) | 2026.08.26 |
| 남기석, 62세, 남성, 아파트 경비원 (0) | 2026.08.25 |
| 송미경, 39세, 여성 교정공무원 (2) | 2026.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