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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자료실/인간 심리 관찰

배진아, 45세, 여성, 동네 미용실 원장

by 마음 탐구소 2026. 9. 2.

배진아는 경북 영천의 오래된 주택가에서 11년째 1인 미용실을 운영한다. 커트 1만 5천 원, 염색 4만~6만 원 정도를 받는다. 월수입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생활비를 제외하고 조금씩 저축할 정도는 된다.

결혼한 적은 없다. 스물아홉 살부터 마흔한 살까지 한 남성과 오래 연애했지만 결국 결혼하지 않고 헤어졌다. 현재 13평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부모는 같은 시의 다른 동네에 살고 있고, 결혼한 언니 한 명이 대구에 있다.

진아의 미용실에는 손님들이 머리보다 더 많은 것을 놓고 간다.

누가 남편과 싸웠는지, 어느 집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는지, 누가 아파트를 샀는지, 누가 병원에 다니는지.

진아는 스스로 말한다.

“나는 남의 얘기 관심 없어.”

그런데 동네에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알고 있는 것을 언제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다.

1. 현재의 하루

오전 7시 11분

알람이 울린다.

진아는 눈을 뜨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찾아 알람을 끈다.

5분 정도 더 누워 있다.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는 어젯밤 다 마시지 못한 탄산수가 있다.

한 모금 마셨다가 미지근해서 얼굴을 찡그린다.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미용실 예약 문자 두 개.

원장님 오늘 오전 염색 가능하세요?

또 하나.

3시 펌 예약했는데 4시로 바꿀 수 있을까요?

답장을 하기 전에 카카오톡을 먼저 연다.

동네 손님 세 명이 있는 작은 단체방에 밤새 메시지가 와 있다.

미숙: 영희네 아들 또 서울 갔다던데
선자: 이번에는 취업된 거 아님?
미숙: 아니래 ㅋㅋ

진아는 읽는다.

답하지 않는다.

화면을 끄면서 생각한다.

'뭘 그렇게 남의 집 아들까지.'

하지만 양치하면서 문득 궁금해진다.

'그럼 이번에도 면접인가.'

오전 7시 46분

간단하게 토스트를 굽는다.

한쪽에는 버터를 조금 바르고 계란 하나를 올린다.

먹으면서 예약 답장을 한다.

네 10시 30분 가능하세요.

다른 손님에게는

네 4시로 변경해드릴게요.

답장을 보내자 곧바로

감사합니다 ^^

가 온다.

진아는 날짜별 예약장을 연다.

오늘은 총 여섯 명.

'적당하네.'

예전에는 예약이 비어 있으면 불안했다.

지금은 오히려 너무 꽉 차 있으면 피곤하다.

돈은 더 벌고 싶다.

사람은 조금 덜 만나고 싶다.

둘은 잘 양립하지 않는다.

오전 8시 39분

미용실 셔터를 올린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켠다.

10평 남짓한 공간.

의자 두 개가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다.

혼자 운영하면서 다른 디자이너를 들일까 여러 번 생각했지만 포기했다.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싫었다.

바닥을 쓸고 거울에 묻은 얼룩을 닦는다.

화분 잎 하나가 누렇게 변했다.

가위로 잘라낸다.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낸다.

어제 직접 내려둔 커피가 있는데도 캔커피를 마신다.

'이게 더 맛있어.'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가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생기면 이상하게 손님이 기다려진다.

오전 9시 07분

첫 손님이 들어온다.

60대 후반의 정옥이다.

“진아야.”

“오셨어요.”

“나 너무 일찍 왔나?”

“괜찮아요. 앉으세요.”

정옥은 한 달에 한 번씩 염색하러 온다.

가운을 두르고 앉자마자 말한다.

“너 박 사장네 며느리 얘기 들었어?”

진아가 염색약을 섞으며 대답한다.

“무슨 얘기요?”

사실 어제 다른 손님에게 들었다.

며느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정옥이 목소리를 낮춘다.

“집 나갔다던데.”

진아는 처음 듣는 표정을 만든다.

“진짜요?”

“몰랐어?”

“네.”

거짓말을 하면서 죄책감은 거의 없다.

손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른 손님에게 아는 척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오래전에 배웠다.

정옥이 말한다.

“그 집 남편이 성격이 좀 그렇다더라.”

진아가 대답한다.

“집안일은 둘밖에 모르죠.”

정옥이 거울 속으로 진아를 본다.

“너는 꼭 이런 데서 바른 말 한다.”

진아는 웃는다.

“괜히 말했다가 욕먹어요.”

정옥도 웃는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말하잖아. 넌 말 안 옮기니까.”

그 말을 들으면 진아는 기분이 좋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한다.

'내가 아예 안 옮기는 건 아닌데.'

오전 9시 42분

염색약을 기다리는 동안 정옥이 휴대전화를 본다.

“우리 딸이 이번에 일본 간대.”

“좋겠네요.”

“혼자 간대. 서른여덟 먹고 혼자 여행을 왜 가니?”

진아가 웃는다.

“혼자 가는 게 편할 수도 있죠.”

“너도 그러니까 결혼을 안 하지.”

말은 가볍다.

정옥도 악의가 없다.

진아는 별일 아닌 것처럼 대답한다.

“저는 못 간 거죠.”

정옥이 잠깐 멈춘다.

“에이, 네가 마음만 먹으면 가지.”

“이 나이에 누가 데려가요.”

“너 아직 괜찮아.”

진아는 웃는다.

대화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나 머리를 감겨주면서 방금 말한

‘못 간 거죠’

라는 자신의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평소에는 결혼을 안 했다고 말한다.

가끔은 못 했다고 말한다.

두 표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진짜인지 자신도 정확히 모르겠다.

오전 10시 31분

예약한 30대 여성 손님이 들어온다.

처음 오는 사람이다.

“염색 예약했어요.”

“네, 이쪽 앉으세요.”

진아는 처음 보는 손님에게는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다.

색상과 모발 상태 정도만 묻는다.

“직장은 근처세요?”

손님이 먼저 말을 시작한다.

“아뇨. 친정 와서요.”

“아.”

“여기가 친정인데 결혼하고 울산 살아요.”

“멀지 않네요.”

조금 지나자 손님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아이 둘.

남편 직장.

시어머니.

아이 학원.

처음 만난 지 30분도 안 됐는데 꽤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진아는 이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한다기보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할 때 더 쉽게 말을 하는 것 같다.

오전 11시 18분

손님이 갑자기 묻는다.

“원장님은 결혼하셨어요?”

“아니요.”

“아, 진짜요?”

진아는 속으로 생각한다.

'뭐가 그렇게 놀랍지.'

그러나 표정은 그대로다.

“네.”

“혼자 사세요?”

“네.”

“좋겠다.”

진아가 웃는다.

“좋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죠.”

손님이 바로 말한다.

“저는 하루만 혼자 있고 싶어요.”

진아가 대답한다.

“막상 계속 혼자면 또 달라요.”

손님이 잠시 생각한다.

“그렇겠죠?”

진아는 더 설명하지 않는다.

둘 다 상대방 삶에서 자기에게 없는 부분을 잠깐 부러워한다.

오후 12시 06분

손님이 나간다.

진아는 편의점에서 사온 김밥을 먹는다.

먹는 동안 어머니에게 전화가 온다.

“응.”

“밥 먹나?”

“응.”

“뭐 먹는데?”

“김밥.”

“맨날 그런 거 먹지 마.”

“맛있어.”

어머니가 말한다.

“아버지가 오늘 정형외과 간다.”

“왜?”

“무릎 아프대.”

진아는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많이 아파?”

“맨날 아프다 하지 뭐.”

“내가 오후에 갈까?”

“일해. 내가 데리고 가.”

“진짜 괜찮아?”

“괜찮다.”

진아는 통화를 끝낸다.

다시 김밥을 먹으려는데 맛이 조금 덜하다.

어머니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검색창에

‘60대 무릎 통증 원인’

을 검색한다.

오후 12시 47분

예약 없는 시간.

진아는 거울 앞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본다.

SNS에서 고등학교 동창의 사진이 보인다.

남편과 대학생 딸과 함께 제주도에 간 사진이다.

댓글에는

보기 좋은 가족

딸이 엄마 닮았네

같은 말이 달려 있다.

진아는 사진을 두 장 넘겨본다.

좋아요는 누르지 않는다.

그 동창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몇 년간 연락하지 않았다.

화면을 닫는다.

'다들 자기 사는 거 사는 거지.'

그런데 10분쯤 뒤 휴대전화를 다시 열어 그 사진을 한 번 더 본다.

딸이 엄마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다.

진아는 여행지가 아니라 그 자세를 본다.

오후 1시 22분

50대 남성 손님이 커트를 하러 온다.

오래된 손님인 김태영이다.

“늘 하던 대로요.”

“네.”

머리를 자르다가 태영이 묻는다.

“최 사장 요즘 가게 안 나오던데 어디 아픈가?”

진아는 안다.

지난주 최 사장 부인이 와서 남편이 전립선 수술을 받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답한다.

“저도 요즘 못 봤어요.”

태영이 말한다.

“여기 오면 동네 소식 다 알 줄 알았는데.”

진아가 웃는다.

“제가 방송국이에요?”

“미용실이 원래 방송국이지.”

둘이 웃는다.

진아는 가위를 움직인다.

자신이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에는 약간의 만족감이 있다.

그런데 그 정보를 말하지 않는 것에도 또 다른 만족감이 있다.

‘나는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이 이미지를 자신에게도 유지하고 싶다.

오후 2시 04분

태영이 계산하면서 말한다.

“근데 그 박 사장네 며느리 집 나간 거 알지?”

진아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한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다들 그 얘기만 하네요.”

말하고 난 순간 후회한다.

태영이 바로 묻는다.

“누가 또 말했어?”

진아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한다.

“그냥 요즘 손님들이요.”

“누구?”

“왜요. 조사하세요?”

웃어서 넘긴다.

태영도 웃는다.

하지만 손님이 나간 뒤 진아는 생각한다.

'괜히 말했네.'

내용을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를 전달했다.

자신이 세워둔 기준에서는 그것도 조금 걸린다.

오후 2시 38분

잠시 한가하다.

진아는 미용실 입구 유리창에 붙은 가격표를 바라본다.

작년부터 가격을 올릴까 고민하고 있다.

근처 미용실보다 조금 싸다.

재료비는 올랐다.

그런데 오래된 손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펌 가격을 5천 원 올리면 몇 명은

“많이 올랐네.”

라고 할 것이다.

진아는 그 말을 듣기 싫다.

손님이 끊길까 두려운 것보다는

‘돈 밝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더 싫다.

그러면서 카드 명세서를 볼 때마다

'내가 왜 이렇게 싸게 받지.'

라고 생각한다.

가격표 파일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오후 3시 17분

예약 없이 70대 손님이 들어온다.

“진아야, 오늘 파마 좀 하면 안 되나?”

“오늘 예약 꽉 찼는데요.”

“나 조금만 기다리면 안 돼?”

진아는 오후 예약을 본다.

4시, 5시 30분.

지금 시작하면 시간이 빠듯하다.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아요.”

손님의 표정이 아주 약간 실망한다.

“그래?”

“내일 오전은 돼요.”

“내일은 내가 병원 가야 해서.”

진아가 잠깐 망설인다.

“그러면 오늘 커트만 하고 파마는 다음에 할까요?”

“파마하려고 온 건데.”

진아의 머릿속에서 시간이 계산된다.

결국 말한다.

“그러면 해드릴게요. 대신 제가 조금 빨리 해야 돼요.”

손님이 바로 웃는다.

“내가 역시 진아밖에 없다.”

진아도 웃는다.

그러나 손님이 앉은 뒤 속으로 생각한다.

'왜 맨날 내가 이러지.'

오후 4시 03분

4시 예약 손님이 도착한다.

진아는 예상보다 15분 늦었다.

“죄송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괜찮아요.”

손님은 그렇게 말하지만 휴대전화를 계속 본다.

진아는 마음이 급해진다.

아까 예약 없이 온 손님에게 화가 나는 것도 아니다.

자기에게 화가 난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면 됐잖아.'

그러면서도 실제로 돌려보냈다면 집에 가서

'그냥 해줄걸.'

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후 4시 48분

펌을 하는 동안 손님이 남편 이야기를 한다.

“우리 남편이 요즘 퇴직하고 집에만 있거든요.”

진아가 웃는다.

“많이 답답하시겠어요.”

“진짜 미쳐요. 하루 종일 뭐 먹냐고 물어봐.”

둘이 웃는다.

손님이 말한다.

“원장님은 혼자 사니까 이런 스트레스 없어서 좋겠다.”

진아가 대답한다.

“대신 저 아프면 물 갖다줄 사람도 없어요.”

농담처럼 말한다.

손님은 잠깐 조용해진다.

“하긴…”

진아는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것 같아 바로 말을 돌린다.

“남편분도 좀 지나면 자기 할 일 찾으시겠죠.”

손님도 다시 남편 욕을 시작한다.

진아는 들어준다.

오후 5시 36분

다음 손님은 20대 후반 남성이다.

커트를 하면서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진아도 필요한 말만 한다.

“앞머리 이 정도 괜찮으세요?”

“네.”

“옆은 조금 더 칠까요?”

“네.”

10분 넘게 침묵이 이어진다.

진아는 이런 손님이 편하면서도 어색하다.

대화를 안 해도 되니 편하다.

그런데 자신이 서비스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묻는다.

“오늘 퇴근하고 오셨어요?”

“네.”

대화는 다시 끝난다.

진아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냥 말하지 말자.'

조금 뒤 남자가 갑자기 묻는다.

“여기 오래 하셨어요?”

그 질문 하나로 10분 정도 대화가 이어진다.

남자가 나간 뒤 진아는 생각한다.

'말 없는 사람도 말하고 싶을 때가 있구나.'

오후 6시 28분

마지막 손님이 나간다.

진아는 문을 잠그지 않고 잠시 의자에 앉는다.

오늘 카드 매출을 확인한다.

27만 5천 원.

현금까지 하면 31만 원 조금 넘는다.

'괜찮네.'

바로 다음 생각.

'아까 한 명 더 받았으면 더 했지.'

그리고 또 생각한다.

'아니야. 죽겠다.'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욕구와 일이 줄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매일 같이 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묻는다면 둘 다다.

오후 6시 51분

미용실 바닥을 쓸다가 휴대전화가 울린다.

언니다.

“왜.”

“엄마한테 들었어? 아빠 병원 간 거.”

“응. 뭐래?”

“연골 좀 닳았대. 나이 들면 그렇대.”

진아가 안도한다.

“주사 맞았어?”

“응.”

언니가 잠시 뒤 말한다.

“근데 너 엄마 아빠 좀 자주 봐라.”

진아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나 자주 가.”

“엄마는 네가 바쁘다고 잘 안 온다던데.”

“지난주에도 갔거든?”

“나는 그냥 말한 거야.”

진아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언니는 대구 살면서 뭘 그렇게 알아.”

잠시 정적.

언니가 말한다.

“왜 갑자기 성질이야?”

“성질낸 거 아니야.”

대화가 조금 어색하게 끝난다.

오후 7시 13분

셔터를 내린다.

차에 타기 전에 언니와의 통화를 다시 생각한다.

'내가 좀 예민했나.'

그러다가

'자기는 멀리 있으니까 말이 쉽지.'

라고 생각한다.

부모 병원에 실제로 함께 가는 것은 대개 진아다.

집에 필요한 물건을 사주는 것도 자신이다.

그래서 언니에게 평가받는 느낌이 싫었다.

하지만 언니도 큰돈이 필요할 때는 부모에게 더 많이 보탠다.

진아도 안다.

자매 중 누가 더 부모에게 잘하는지를 계산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화가 날 때는 계산하고 싶어진다.

오후 7시 42분

부모 집에 들른다.

어머니가 현관을 열며 말한다.

“일 끝났나?”

“응. 아빠는?”

“안에 있지.”

아버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다.

“병원 갔다 왔다며.”

“뭐 별거 아니다.”

“의사가 뭐래?”

“늙어서 그렇다잖아.”

진아가 무릎을 본다.

“약은?”

“저기 있다.”

“제때 먹어.”

아버지가 웃는다.

“네가 의사냐.”

“그럼 안 먹든가.”

말은 퉁명스럽지만 약 봉투를 들어 복용시간을 확인한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말한다.

“밥 먹고 가.”

“나 집에서 먹을게.”

“뭐 먹게?”

진아는 대답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말한다.

“봐라. 먹을 것도 없으면서.”

결국 식탁에 앉는다.

오후 8시 09분

세 사람이 밥을 먹는다.

아버지가 반찬을 집으며 묻는다.

“미용실은 잘 되나?”

“그냥.”

“장사 안 되면 접어.”

진아가 웃는다.

“그렇게 쉽게 접어요?”

“힘들게 하지 말라는 거지.”

어머니가 말한다.

“얘는 가게 없으면 심심해서 못 살아.”

진아가 바로 대답한다.

“나 사람 안 만나도 잘 살아.”

부모가 둘 다 웃는다.

“네가?”

진아도 웃는다.

“왜.”

아버지가 말한다.

“너 어릴 때부터 사람 얘기 듣는 거 좋아했잖아.”

진아가 반박한다.

“난 남 얘기 관심 없다니까.”

어머니가 웃는다.

“관심 없는 애가 누가 누구랑 결혼했는지는 다 알더라.”

진아도 결국 웃는다.

오후 8시 47분

집을 나오기 전에 어머니가 반찬통 두 개를 건넨다.

“이거 가져가.”

“필요 없어.”

“가져가.”

“냉장고에 아직 있어.”

“그건 버리고.”

진아는 싫다고 두 번 말하고 결국 받는다.

차에 타면서 생각한다.

'엄마는 왜 싫다는데 맨날 줘.'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으면 마음이 조금 든든해진다.

오후 9시 21분

집.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는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가 다시 넣는다.

내일 아침 얼굴 붓는 것이 싫다.

대신 탄산수를 마신다.

TV에서 연애 프로그램이 나온다.

남녀가 서로 과거 연애사를 이야기한다.

진아는 보면서 중얼거린다.

“저런 걸 왜 저기서 말해.”

그러면서 채널을 바꾸지 않는다.

오후 9시 54분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온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예전 남자친구의 이름이다.

잘 지내지?
오늘 영천 지나가다가 가게 생각나서.

진아는 화면을 가만히 본다.

13년 사귀었던 사람이다.

헤어진 지 4년이 됐다.

상대는 지금 결혼했다.

진아도 그것을 알고 있다.

답장을 쓰지 않는다.

5분 뒤 다시 읽는다.

'결혼한 사람이 왜 이런 걸 보내.'

조금 불쾌하다.

동시에 아주 작게 반갑다.

그 반가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후 10시 08분

답장을 쓴다.

응 잘 지내. 너도 잘 지내지?

보내기 직전에 지운다.

다시 쓴다.

응 잘 지내.

보낸다.

상대가 곧 답한다.

다행이네. 가게 아직 하지?

진아:

응.

상대:

나중에 지나갈 일 있으면 한번 갈게.

진아의 얼굴이 굳는다.

답하지 않는다.

'미쳤나.'

생각한다.

그러면서 상대가 정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을 잠깐 상상한다.

그 장면에서는 자신이 아주 아무렇지 않다.

그 상상이 마음에 들어 조금 더 생각한다.

오후 10시 32분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아까 내가 좀 예민했음

언니가 바로 답한다.

나도 말 이상하게 했어 ㅋㅋ

진아:

아빠 별거 아니라네

언니:

응 다행

대화는 그것으로 끝난다.

진아는 먼저 사과한 자신이 조금 대견하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후 10시 58분

침대에 눕는다.

오늘 들었던 이야기들이 아무 순서 없이 떠오른다.

집 나갔다는 며느리.

딸이 일본에 간다는 정옥.

퇴직한 남편 때문에 힘들다는 손님.

아버지 무릎.

예전 남자친구.

진아는 남의 이야기를 퍼뜨리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원장님한테만 말하는 건데.”

라고 하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조금은 기분이 좋다.

자신이 신뢰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진아는 아직 자기 안에 신뢰받고 싶은 욕구와 남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다 하지.'

밤 11시 24분.

예전 남자친구와의 대화방을 한 번 더 연다.

새 메시지는 없다.

진아는 대화방을 나가지는 않는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고 잠을 청한다.

2. 이 사람의 일생

유년기 — 말 많은 집과 말 적은 아이

진아는 1981년 영천에서 두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기계 부품 업체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작은 반찬가게를 운영했다.

집은 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친척,

이웃,

어머니 친구,

가게 손님.

어머니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 돌아오면

“오늘 시장에서 누굴 만났는지”

“어느 집 딸이 어디 취직했는지”

같은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했다.

아버지는 대부분

“그래.”

라고 대답했다.

진아는 옆에서 듣는 것을 좋아했다.

직접 말하는 것보다 듣는 편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말했다.

“쟤는 조용한데 다 듣고 있어.”

실제로 그랬다.

자매 관계

세 살 많은 언니는 진아보다 적극적이었다.

학교에서도 반장을 했고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잘 요구했다.

진아는 언니와 크게 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교는 있었다.

어른들이 말했다.

“언니는 야무지고 진아는 순하네.”

진아는 자신이 순하다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말을 덜 할 뿐,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언니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해서 받으면 진아는 속으로 부러워하면서도 따라 부탁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너는 필요한 거 없어?”

라고 물으면

“없어.”

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진아는 어려서부터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원하는 마음 자체가 약해지는 경험을 반복했다.

학교생활

성적은 중하위권에서 중간 정도였다.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다.

대신 친구들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체육대회 전날 친구에게 머리를 땋아줬고, 축제 때는 다른 반 아이까지 찾아왔다.

친구가

“너 미용하면 잘하겠다.”

고 한 것이 기억에 남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진로를 고민했고 결국 미용학원에 다녔다.

부모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대학보다는 빨리 기술을 배우는 선택이 당시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20대 — 미용실 막내

스무 살부터 대구의 미용실에서 일했다.

처음 몇 년은 힘들었다.

청소,

샴푸,

수건 정리,

심부름.

손님이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선배 디자이너를 찾았다.

그러나 진아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의외로 잘 맞았다.

특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

손님이 대부분 이야기했다.

진아는 맞장구를 쳤다.

“그러셨어요?”

“진짜요?”

“힘드셨겠어요.”

처음에는 서비스라고 배웠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됐다.

다만 한 가지는 빠르게 배웠다.

손님 이야기를 다른 손님에게 그대로 하면 안 된다.

한 번은 스물두 살 때 가볍게 전달한 이야기가 돌고 돌아 처음 말한 손님에게 들어갔다.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선배에게 크게 혼났다.

“우리는 머리만 만지는 게 아니야. 사람 비밀도 들고 있는 거야.”

진아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26세 — 오래된 연애의 시작

스물여섯 살 때 거래처 직원이던 박재훈을 만났다.

재훈은 진아보다 두 살 많았다.

말이 많지 않고 온순한 사람이었다.

둘은 아주 뜨거운 관계라기보다 편안한 관계였다.

퇴근 후 만나 밥을 먹고,

주말에 가까운 곳을 다녀오고,

서로 가족 행사에도 참석했다.

주변에서는 당연히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은 계속 미뤄졌다

재훈은 직장을 몇 번 옮겼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가 있었다.

진아 역시 자신의 가게를 갖고 싶었다.

둘은 말했다.

“조금만 안정되면 하자.”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났다.

진아는 적극적으로 결혼 날짜를 잡자고 말하지 않았다.

재훈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싸웠다.

진아가 말했다.

“그래서 언제 할 건데?”

재훈이 말했다.

“너는 그렇게 하고 싶어?”

그 질문을 들으면 진아는 이상하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결혼을 원했다.

그런데

‘내가 꼭 결혼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싫었다.

재훈이 먼저 확실하게 선택해주기를 바랐다.

재훈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서로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34세 — 자신의 미용실을 열다

영천으로 돌아와 작은 가게를 얻었다.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 일부는 부모에게 빌렸다.

처음에는 손님이 적었다.

하루에 두 명만 오는 날도 있었다.

진아는 가게 문을 열어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계속 봤다.

손님이 들어오면 지나치게 반가운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몇 년 지나면서 단골이 생겼다.

동네 미용실이라는 특성상 고객 관계는 단순한 서비스 관계를 넘어갔다.

손님의 아이가 초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생이 되는 것을 봤다.

어머니 장례식 때문에 한동안 오지 못했던 손님도 다시 왔다.

이혼한 뒤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미용실 의자에 쌓였다.

진아는 자신이 동네 사람들에게 꽤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30대 후반 — 결혼에 대한 압박이 가장 심했던 시기

친구와 사촌들이 대부분 결혼했다.

손님들도 물었다.

“원장님은 언제 해?”

“남자친구 오래 만났잖아.”

어머니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아는 점점 그런 질문에 짜증이 났다.

그럴수록

“난 결혼 별로 생각 없어.”

라고 말했다.

그런데 재훈이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또 화가 났다.

이 모순 때문에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결혼을 정말 원하는지,

사회가 결혼하라고 해서 원하는 것인지,

재훈과 결혼하고 싶은 것인지,

그냥 오랫동안 만났으니 결론을 내고 싶은 것인지.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다.

41세 — 이별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둘은 어느 날 저녁을 먹다가 또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재훈이 새로운 지역으로 이직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진아가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재훈이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결정적이었다.

진아가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할까?”

재훈도 바로 붙잡지 않았다.

13년 관계가 그렇게 끝났다.

집에 돌아온 뒤 진아는 거의 울지 않았다.

오히려 서랍 속에 있던 재훈 물건을 정리했다.

며칠 뒤부터 많이 힘들었다.

일상 속 거의 모든 것에 재훈이 있었다.

좋아하는 식당,

주말 시간,

TV 프로그램,

운전할 때 듣는 음악.

진아가 잃은 것은 사람 하나뿐 아니라 13년 동안 반복된 생활의 구조이기도 했다.

전 남자친구의 결혼

헤어진 지 약 1년 반 뒤 재훈이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손님에게서였다.

손님은 진아가 그와 오래 연애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박재훈 씨 알죠? 이번에 결혼한다던데.”

진아는 드라이어를 들고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날 손님이 나간 뒤 20분 정도 아무 예약도 없었다.

진아는 휴대전화를 보다가 화장실에 들어가 울었다.

자신이 재훈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우는 것인지,

자신과는 13년 동안 하지 않았던 결혼을 다른 사람과 빠르게 한 것이 억울해서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아마 둘 다 조금씩 있었다.

그날도 다음 손님이 오자 아무 일 없이 일했다.

40대의 현재

헤어진 지 4년이 지났다.

진아는 현재 연애를 하지 않는다.

소개를 몇 번 받았지만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혼자 사는 생활에는 꽤 익숙하다.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먹고,

자고,

TV를 보고,

집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

그 자유를 좋아한다.

그런데 가끔 자신이 선택해서 혼자인지, 시간이 흘러 혼자가 된 것인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 질문을 너무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자신에게는 가게가 있고,

부모가 있고,

언니가 있고,

오래된 손님들이 있다.

완전히 외롭지도 않고,

완전히 만족스럽지도 않다.

진아는 그것을 특별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3. 현재 심리와 일생의 연결

왜 진아는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그렇게 많은 것을 기억할까?

진아에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한 가십만은 아니다.

20년 넘게 미용 일을 하면서 대화를 통해 고객과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배웠다.

지난번에 손님의 아들이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면 다음에

“아드님 시험은 어땠어요?”

라고 묻는다.

손님은 자신이 기억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기억은 진아의 직업 능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호기심도 존재한다.

누가 누구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궁금하다.

누가 이혼했다면 이유가 궁금하다.

진아는 이 부분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가십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기 이미지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가십성 호기심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 손님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 것에 만족감을 느낄까?

단순한 직업윤리만은 아니다.

진아는

“원장님은 말 안 옮기니까.”

라는 말을 좋아한다.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즉 비밀을 지키는 데에는 상대를 보호하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동기가 같이 있다.

그렇다고 후자의 동기가 있다고 해서 전자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도덕적 행동에는 종종 자기 이미지에 대한 욕구도 함께 들어 있다.

왜 예약 없는 손님을 거절하지 못하고 나중에 짜증을 냈을까?

진아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불가능하면 거절할 수 있다.

문제는 조금 무리하면 가능한 상황이다.

그럴 때 상대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다.

또한

“내가 역시 진아밖에 없다.”

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도 좋다.

따라서 스스로 선택해서 일을 받아놓고 나중에는 피곤함 때문에

“왜 내가 이러지.”

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선의, 단골을 잃고 싶지 않은 경제적 계산, 좋은 원장이 되고 싶은 욕구, 상대 실망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모두 섞여 있다.

왜 가격을 올리지 못할까?

돈을 벌기 싫어서가 아니다.

진아는 자신이 충분히 벌기를 원한다.

하지만 가격 인상에는 경제 문제 외의 의미가 붙는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손님에게 5천 원을 더 받는 순간,

상대가 자신을

“예전과 달라졌다.”

거나

“돈을 밝힌다.”

고 생각할 가능성을 상상한다.

실제로 손님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다.

진아가 미리 만들어낸 판단도 상당 부분 있다.

그녀는 경제적 가치를 올리는 것을 관계의 변화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저렴하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만족감을 얻고,

동시에 자신의 노동가치를 너무 낮게 책정한다는 불만을 느낀다.

왜 부모를 챙기면서 언니의 한마디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진아에게 부모를 챙기는 행동은 꽤 중요한 자기 정체성의 일부다.

병원에 동행하고,

약을 확인하고,

집에 들른다.

그것을 크게 생색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색내는 사람이 되기 싫다.

그렇기 때문에 언니가

“부모 좀 자주 봐라.”

라고 말하는 순간 억울함이 더 크다.

자신이 말하지 않고 해온 행동을 상대가 알아주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진아가 인정받으려고 행동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끼면 화가 난다는 것이다.

인정 욕구는 언제나 칭찬을 직접 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왜 결혼을 원하면서도 먼저 요구하지 않았을까?

진아의 오랜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그녀는 결혼을 어느 정도 원했다.

하지만

“나와 결혼해달라.”

고 요구해서 얻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다.

상대가 자발적으로

“나는 너와 결혼하고 싶다.”

라고 선택해주기를 원했다.

이것은 사랑받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기도 했다.

자신이 먼저 원한다고 말하면 상대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

말하지 않으면 적어도 직접 거절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대가로 상대는 진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재훈에게도 책임이 있고 진아에게도 책임이 있다.

두 사람 관계를 한 사람의 회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왜 전 남자친구의 메시지가 불쾌하면서도 반가웠을까?

두 감정은 충분히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진아는 상대가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연락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 판단은 진심이다.

동시에 13년을 함께한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서 아주 작은 만족을 느낀다.

그것도 진심이다.

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다른 감정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아가 정말 원하는 것은 재회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그 사람 인생에서 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구나.”

라는 확인에 더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런 식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그냥

“결혼한 사람이 왜 이래.”

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자기이해가 현재의 진아에게 더 자연스럽다.

진아가 가진 더 큰 모순

진아는 독립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혼자 가게를 운영하고,

혼자 살며,

다른 사람에게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억되기를 원한다.

손님이 다른 미용실로 가면 별일 아닌 척하면서 조금 섭섭하다.

부모가 언니에게만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나쁘다.

옛 연인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반응한다.

즉 진아가 원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다.

필요할 때 혼자 있을 수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삶에서 일정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그 두 욕구는 서로 반대가 아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강해지는 날에는 다른 한쪽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립고,

사람을 오래 만나면 혼자 있고 싶다.

진아는 그것을 성격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하루가 그런 날이라고 생각한다.

4. 이 사람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기

1. 누군가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를 궁금해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악의적인 가십일까?

진아의 호기심에는 재미도 있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관계를 이어가려는 마음도 섞여 있다. 반대로 좋은 의도로 관심을 갖더라도 상대의 사생활을 침범할 수 있다. 관심과 참견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2. 당신도 원하는 것을 직접 요구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알아서 해주기를 기대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진아는 결혼을 원했지만 상대가 먼저 선택하기를 기다렸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생색내고 싶지는 않고,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지만 외롭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표현하지 않은 욕구를 상대가 알아주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어디까지 상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3. 당신이 진아의 손님이라면 그녀를 단순히 ‘말 잘 들어주는 친절한 미용사’라고 생각했을까?

하루 동안 수십 년의 가족사와 걱정, 자랑, 비밀을 듣는 일이 반복되면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이 매일 타인의 사적인 삶을 들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을 20년 동안 했다면,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까?

경북 영천의 1인 미용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45세 원장 배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