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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자료실/인간 심리 관찰

박준호, 37세, 세종시에서 세 아이를 돌보는 전업 아버지

by 마음 탐구소 2026. 8. 14.

현재의 하루

오전 6시 07분

준호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뜬다.

옆자리에서 아내 지현은 아직 자고 있다.

침대 발치에는 막내가 어젯밤 벗어놓은 양말 한 짝이 떨어져 있다.

준호는 양말을 집어 빨래바구니에 넣고 주방으로 간다.

냉장고를 연다.

계란 네 개.

우유 반 통.

어제 해둔 미역국.

첫째는 계란찜을 좋아하고 둘째는 계란찜에 파가 들어가면 먹지 않는다.

막내는 아침에 기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준호는 계란을 세 개 꺼낸다.

파는 따로 볶는다.

물이 끓는 동안 학교 알림 앱을 확인한다.

2학년 현장체험학습 준비물: 물통, 모자, 개인 돗자리

돗자리.

준호는 잠깐 멈춘다.

집에 작은 돗자리가 있었던 것 같다.

베란다 수납장을 머릿속으로 뒤진다.

어디 넣었더라.

지현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자신이 찾기로 한다.

이런 질문을 하면 지현은 대부분 모른다.

그 사실이 은근히 기분 좋을 때가 있다.

집 안에서 어떤 물건이 어디 있는지를 자신만 아는 일이 많아졌다.

오전 6시 51분

지현이 주방으로 나온다.

“커피 있어?”

준호가 커피머신을 가리킨다.

“내렸어.”

지현은 컵을 들고 선 채 마신다.

오늘 오전 수술이 있는 날이다.

지현은 대학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다.

“나 오늘 좀 늦을 수도 있어.”

준호는 냉장고 문을 닫으며 묻는다.

“몇 시?”

“모르겠어. 여덟? 아홉?”

준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지현이 묻는다.

“저녁 괜찮겠어?”

“뭐가.”

“애들 셋 혼자.”

준호가 웃는다.

“내가 매일 혼자인데 뭘.”

말투는 가볍다.

지현도

“그러네.”

하고 웃는다.

그런데 준호는 컵을 씻으면서 조금 걸린다.

괜찮겠냐는 걸 왜 묻지.

아내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냥 미안해서 한 말이다.

그래도 ‘애들 셋을 혼자 볼 수 있는가’를 확인받는 상황이 아직 완전히 자연스럽지는 않다.

오전 7시 22분

집이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첫째 민재는 초등학교 2학년.

둘째 민서는 여섯 살.

막내 민우는 세 살이다.

“아빠, 얘가 내 거 먹었어.”

“아빠, 양말 없어.”

“아빠 쉬.”

세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나온다.

준호가 큰 소리로 말한다.

“한 명씩.”

아무도 한 명씩 말하지 않는다.

민재가 동생 접시에 있던 소시지를 가져간다.

민서가 운다.

준호가 말한다.

“민재야, 동생 거 가져가지 말라고 했지.”

“쟤 안 먹는다 했어.”

“그래도 물어보고 먹어야지.”

“아빠는 어제 내 아이스크림 먹었잖아.”

준호가 잠깐 멈춘다.

“그건 녹을 것 같아서.”

민재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게 뭔 상관이야.”

준호는 웃음이 날 것 같지만 참는다.

“알았어. 그건 아빠가 잘못했다.”

민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준호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말은 잘하네, 진짜.

자신을 닮은 것 같아서 조금 얄밉고 조금 뿌듯하다.

오전 8시 34분

두 아이를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막내와 집으로 돌아온다.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 남자가 탄다.

몇 번 인사만 한 이웃이다.

“출근 안 하세요?”

준호가 웃는다.

“저는 집에서 애 봐요.”

“아, 육아휴직?”

“아니요. 그냥 제가 봅니다.”

남자가 잠시 머뭇거린다.

“아… 아내분이 일하시나 보네요.”

“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좋으시겠네요.”

남자가 웃으며 내린다.

준호도 웃는다.

문이 닫힌 뒤 작게 말한다.

“뭐가 좋은데.”

막내가 묻는다.

“아빠 뭐가 좋아?”

준호는 웃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 남자가 악의를 가지고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준호에게 좋은 점도 많다.

출퇴근이 없고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많이 본다.

그런데 ‘좋겠다’라는 말 속에 노동이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오전 9시 16분

막내가 장난감을 꺼내는 동안 준호는 청소기를 돌린다.

소파 밑에서 과자 부스러기가 나온다.

“민우야, 여기서 과자 먹었지?”

민우가 고개를 젓는다.

입가에 초콜릿이 묻어 있다.

“안 먹었어.”

준호는 웃는다.

“그래.”

예전 같으면 바로 닦게 했을 것이다.

요즘은 모든 것을 고치려고 하면 하루 종일 화만 내게 된다는 것을 안다.

청소기를 돌리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대학 동기 단체방이다.

한 친구가 부장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축하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온다.

준호도 쓴다.

이야 벌써 부장이냐 ㅋㅋ 축하한다

친구가 답한다.

너는 애 셋 키우는 게 더 대단하다 ㅋㅋ

다른 친구가

준호 인생 승리자지

라고 쓴다.

준호는 화면을 본다.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승리자’라는 말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한동안 친구의 회사 직급이 생각난다.

부장.

자신은 회사에서 과장까지 갔었다.

퇴사한 지 4년 됐다.

잠깐 생각한다.

계속 있었으면 나는 뭐 하고 있었을까.

곧 막내가 휴지를 통째로 뽑아놓은 것을 발견한다.

생각이 끝난다.

오전 11시 28분

막내와 장을 보러 간다.

카트에 아이를 태우고 우유, 두부, 바나나를 담는다.

고기를 고르는데 100g 가격을 비교한다.

한우를 집었다가 다시 놓고 돼지고기를 고른다.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지현의 소득은 세후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다.

부부 명의의 아파트도 있고 대출도 감당 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준호는 장을 볼 때 가격을 꼼꼼하게 본다.

결혼 초에는 그러지 않았다.

자기 월급이 있을 때는 오히려 즉흥적으로 샀다.

지금은 이상하게 더 아낀다.

지현이

“그 정도는 그냥 사.”

라고 말할 때면 준호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필요 없잖아.”

라고 한다.

대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은 자신이 직접 벌지 않는 돈을 쓰는 데서 오는 미묘한 제동도 있다.

그것을 지현에게 말한 적은 없다.

오후 12시 42분

막내를 재우고 혼자 점심을 먹는다.

냉장고에 남은 카레를 데운다.

유튜브에서 요리 영상을 켜놓는다.

예전 직장 동료에게 전화가 온다.

“야, 오랜만.”

“왜.”

“다음 주 금요일에 몇 명 모이는데 나올래?”

준호가 일정표를 본다.

금요일 밤은 지현이 당직이다.

“안 될 것 같다. 지현이 당직이야.”

“또 애 봐야 돼?”

친구가 웃으며 말한다.

“야, 너 진짜 완전 주부 다 됐다.”

준호도 웃는다.

“주부 맞아.”

친구가 말한다.

“나는 못 한다. 진짜 대단해.”

“안 해봐서 그렇지.”

통화를 끊는다.

준호는 카레를 한 숟갈 먹는다.

친구가 칭찬했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완전 주부’라는 말이 머릿속에 남는다.

자기는 실제로 주부다.

그 사실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누군가 그렇게 규정하면 왜 조금 불편한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오후 2시 17분

막내가 낮잠에서 깬다.

준호는 세탁물을 개면서 아이와 블록을 한다.

민우가 탑을 높이 쌓는다.

무너지자 소리를 지르며 블록을 던진다.

준호가 말한다.

“화나도 던지면 안 돼.”

민우가 또 던진다.

준호가 블록을 치운다.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5분 정도 울음이 계속된다.

준호의 얼굴도 굳어진다.

“그만 울어.”

아이는 더 운다.

준호가 크게 말한다.

“아빠도 힘들어!”

순간 집이 조용해진다.

민우가 울음을 줄이며 준호를 쳐다본다.

준호는 바로 후회한다.

아이 앞에 앉는다.

“미안. 아빠가 크게 말했네.”

민우는 코를 훌쩍인다.

준호가 안아준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는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뭐 맨날 완벽하게 해야 되나.

사과하면서도 완전히 자기 잘못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오후 4시 11분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민재가 현장체험학습 돗자리를 묻는다.

“찾았어?”

준호는 순간 아침 일을 떠올린다.

안 찾았다.

“아직.”

민재가 말한다.

“내일까지 가져가야 돼.”

“알아.”

“아빠 까먹었지.”

“안 까먹었어.”

말이 먼저 나온다.

사실 까먹었다.

민재가 말한다.

“그럼 왜 안 찾았어?”

준호가 잠시 침묵한다.

“알았어. 까먹었어.”

민재는 별 반응 없이 가방을 내려놓는다.

준호는 자신이 왜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는지 조금 우습다.

아이에게는 사과를 잘 가르치면서 자신도 바로 인정하지 못한다.

오후 6시 02분

저녁 준비.

셋째가 주방에 들어오고 둘째가 TV를 크게 켠다.

민재는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부른다.

준호는 프라이팬 앞에서 말한다.

“잠깐만.”

3분 뒤 민재가 다시 부른다.

“아빠!”

“기다려!”

목소리가 커진다.

민재가 입을 닫는다.

준호는 볶음밥을 접시에 담고 식탁에 앉는다.

“어디 봐.”

문제는 간단한 받아올림 덧셈이다.

준호가 설명한다.

민재가 두 번 틀린다.

준호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문득 회사 신입사원에게 업무를 설명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같은 질문을 세 번 받아도 차분했던 것 같다.

남의 자식한테는 친절하고 내 자식한테는 왜 이러냐.

곧 스스로 수정한다.

회사에서는 세 명이 동시에 나 안 찾았잖아.

오후 8시 47분

아이 셋을 씻기고 막내를 재운다.

지현에게 메시지가 온다.

10시쯤 될 듯 미안ㅠ

준호는

천천히 와

라고 답한다.

그다음 거실을 정리한다.

장난감 상자.

컵.

색연필.

소파 쿠션.

전부 제자리에 놓는다.

마지막으로 베란다 수납장을 열어 돗자리를 찾는다.

맨 위 박스 안에 있다.

꺼내며 혼잣말한다.

“있잖아.”

누구에게 증명하는지 알 수 없다.

오후 10시 16분

지현이 들어온다.

아이들은 모두 잔다.

지현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살았다.”

준호가 웃는다.

“밥 먹었어?”

“대충.”

준호가 남은 볶음밥을 데운다.

지현이 먹으며 묻는다.

“오늘 어땠어?”

준호가 대답한다.

“똑같지.”

“애들 말 잘 들었어?”

“똑같다니까.”

준호는 오후에 막내에게 소리쳤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특별히 숨기려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하루 종일 힘들었다고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현이 말한다.

“당신 아니었으면 나 지금 이렇게 일 못 했다.”

준호는 냉장고에 물을 넣으며 대답한다.

“나도 알아.”

농담처럼 말한다.

지현이 웃는다.

준호도 웃는다.

하지만 그 말은 꽤 진심이다.

밤 11시 38분

둘이 침대에 눕는다.

지현은 5분도 되지 않아 잠든다.

준호는 휴대전화를 본다.

낮에 승진 소식을 올렸던 친구의 프로필을 한번 누른다.

회사 행사 사진.

양복.

사원증.

준호는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곧바로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저 생활 다시 하라고 하면 싫어.

실제로 그렇다.

출근시간, 회의, 회식, 실적 압박을 생각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 옆에 붙일 직함이 없다는 사실은 가끔 낯설다.

‘박준호, 전업주부.’

정확한 표현인데도 입으로 말하면 아직 조금 어색하다.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내일 아침 도시락 반찬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 잠든다.

이 사람의 일생

유년기

준호는 1989년 청주에서 형제 없이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어머니는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을 돌봤다.

준호에게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노동으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집안을 꼼꼼하게 관리했다.

아버지는 월급을 벌어오는 역할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임으로 여겼다.

두 사람의 관계가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아버지는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프면 설거지를 하는 정도였다.

준호는 그런 모습을 자연스러운 가족 형태로 배웠다.

학창 시절

공부를 꽤 잘했다.

성격은 사교적인 편이었고 친구가 많았다.

운동도 좋아했다.

학교에서 특별히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서

“남자가 그걸 왜 해.”

같은 말을 별 생각 없이 사용하기도 했다.

요리나 집안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대학에 가기 전 빨래 돌리는 법을 알려주려고 했을 때

“기숙사 가면 알아서 하지.”

라고 말했다.

실제로는 군대에 가서 제대로 배웠다.

20대와 직장생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중견기업 마케팅팀에 입사했다.

회사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일을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야근과 회식이 많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했다.

29세에 친구 소개로 지현을 만났다.

지현은 의대 수련 과정 중이었다.

처음부터 지현의 소득 전망이 자신보다 높다는 사실을 알았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연애할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결혼과 첫째 출산

결혼 후 첫째가 태어났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지현은 수련과 전문의 과정을 계속해야 했다.

준호도 직장을 다녔다.

양가 부모의 도움과 어린이집을 이용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일정 조정이 훨씬 어려워졌다.

아이가 아프면 누가 병원에 갈지 매번 협상해야 했다.

처음에는 소득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준호가 휴가를 더 많이 냈다.

준호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박 과장은 애 때문에 자주 빠지네.”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여성 동료들이 훨씬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조금 이해했다.

전업 아버지가 되기까지

셋째 임신을 알았을 때 부부는 여러 선택을 계산했다.

입주도우미.

양가 부모 도움.

지현의 근무축소.

준호의 휴직.

결국 준호가 먼저 1년 육아휴직을 했다.

생각보다 잘 맞았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고 집안일도 점차 능숙해졌다.

문제는 복직 후였다.

가족생활이 다시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몇 달 고민한 끝에 준호가 퇴사했다.

경제적으로도 지현의 소득이 준호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가계 전체만 놓고 보면 합리적이었다.

주변 반응은 다양했다.

“멋있다.”

“부럽다.”

“나 같으면 못 한다.”

“그래도 남자가 자기 일이 있어야 하지 않냐.”

준호는 마지막 말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가끔 자신도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현재

전업으로 생활한 지 4년째다.

준호는 집안일과 육아에 상당히 능숙하다.

세 아이의 예방접종 일정, 담임교사 이름, 좋아하는 반찬, 친구관계를 지현보다 더 많이 안다.

부부관계도 대체로 안정적이다.

지현은 준호의 역할을 존중한다.

경제적 통제도 하지 않는다.

가계 돈은 공동계좌로 관리한다.

따라서 준호의 불편함을 단순히 아내가 무시해서 생긴 문제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가장 복잡한 부분은 자신도 논리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오래된 기준이 자기 안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심리와 일생의 연결

준호의 하루에는 돈과 노동과 역할이 아주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트에서 한우 대신 돼지고기를 고른 것은 평범한 절약일 수 있다.

세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준호에게는 다른 요소도 조금 섞여 있다.

자신이 직접 벌지 않은 돈이라는 감각이다.

부부는 재산을 공동으로 생각하고 지현도 돈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 경제적 권력관계라기보다 준호 내부에 남아 있는 ‘돈을 버는 사람이 돈을 쓸 권리를 가진다’는 오래된 감각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감각을 준호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평생 집안일을 했던 것을 이제는 분명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이 같은 위치에 오자 이전에 보지 못했던 사회적 평가를 직접 경험한다.

이웃 남자가

“좋으시겠네요.”

라고 했을 때 준호가 불편했던 것도 비슷하다.

실제로 좋은 면이 많다.

그런데 그 말은 아이 셋을 돌보는 하루의 수고를 ‘직장에 안 나가도 되는 생활’로 번역해버리는 것처럼 들렸다.

반대로 친구들이

“애 셋 키우는 게 더 대단하다.”

고 칭찬해도 완전히 편하지 않다.

그것은 또 자신을 특별한 남성 전업주부로 만들어버린다.

준호는 영웅도 되고 싶지 않고 무능한 남편도 되고 싶지 않다.

그냥 자신의 역할이 평범한 노동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도 아직 완전히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후에 막내에게

“아빠도 힘들어!”

라고 소리친 뒤 사과한 장면에서는 다른 모순이 보인다.

준호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아이에게 감정을 설명하고 사과할 줄 아는 부모가 되고 싶다.

동시에 모든 순간 침착해야 한다는 기대에는 반발한다.

육아 관련 콘텐츠를 많이 보면서 부모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상당히 많이 안다.

그래서 실패한 순간에는 단순히 화를 낸 것보다

‘나는 알고 있으면서 왜 못 했지?’

라는 추가적인 자기비판이 생긴다.

직장에 있던 시절과의 비교도 단순하지 않다.

친구의 승진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회사를 다시 다니고 싶지는 않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잃고 싶지도 않다.

준호가 그리워하는 것은 직장생활 전체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알아보기 쉬운 명함일 가능성이 크다.

회사원일 때는

“뭐 하세요?”

라는 질문에 회사와 직급을 말하면 됐다.

지금은 자신이 하루 종일 훨씬 많은 일을 하는데도 설명은 오히려 길어진다.

그래서 준호에게 현재 세상은 조금 역설적이다.

그는 가족 안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 되었지만, 가족 밖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리고 아직 자신도 어느 평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완전히 정하지 못했다.

이 사람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기

1. 준호가 경제적으로 아내에게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부부가 서로 다른 노동을 분담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같은 가족 안에서도 돈으로 환산되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의 가치를 우리는 실제로 동일하게 느끼고 있을까?

2.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서도 선택하지 않은 삶의 지위와 상징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준호가 친구의 승진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현재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볼 수 있을까?

3. 성 역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역할의 기준이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당신 역시 머리로는 거부하지만 자신의 삶을 평가할 때 몰래 사용하는 기준이 있지는 않을까?

세종시 아파트 주방에서 세 아이의 식사와 등교 준비를 챙기는 37세 전업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