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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자료실/인간 심리 관찰

서예림, 22세,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생

by 마음 탐구소 2026. 8. 13.

현재의 하루

오전 7시 12분

예림은 휴대전화 진동에 눈을 뜬다.

대학교 기숙사 2인실.

옆 침대의 룸메이트는 아직 자고 있다.

알람을 끄려다 화면 위에 떠 있는 가족 단체방 메시지를 본다.

어머니가 오전 6시 21분에 올렸다.

오늘도 말씀 붙잡고 승리하자♡
엄마가 새벽기도 때 예림이 기도했어.

아버지는 엄지손가락 이모티콘을 달았다.

남동생은 아무 반응이 없다.

예림은 잠깐 고민하다 하트를 하나 누른다.

답장을 쓰지는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싫지 않다.

오히려 때때로 위로가 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저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아주 작은 숙제를 받은 기분도 든다.

나는 오늘 뭘 승리해야 하는 거지.

휴대전화를 뒤집어놓는다.

5분만 더 누우려고 했는데 12분이 지나 있다.

오전 8시 03분

기숙사 식당에서 토스트와 삶은 계란을 먹는다.

같은 과 친구 수민이 맞은편에 앉는다.

“너 이번 주말에도 전주 가?”

“응. 아마.”

“너 진짜 자주 간다.”

예림은 웃는다.

“엄마가 보고 싶어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일요일에는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 청년부 예배가 있다.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한 달에 두세 번은 내려간다.

수민이 묻는다.

“서울에서는 교회 안 다녀?”

“가끔.”

“어디?”

“아직 정착은 안 했어.”

예림은 토스트를 한 입 먹는다.

실제로 두 곳을 가봤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교회에 앉아 있으니 예상보다 편했다.

예배가 끝났는데도 누군가

“예림아, 오늘 은혜 받았어?”

라고 묻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 좋았다.

그 사실을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오전 9시 38분

교양수업은 ‘현대사회와 윤리’다.

오늘 주제는 종교와 개인의 도덕 판단이다.

교수가 질문한다.

“어떤 행동이 잘못됐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합니까?”

학생들이 몇 가지 답을 한다.

법.

사회규범.

개인의 양심.

종교.

교수가 다시 묻는다.

“그 근거들이 서로 충돌한다면요?”

예림은 필기하다 손을 멈춘다.

고등학교 때였다면 대답이 비교적 쉬웠다.

성경에서 옳다고 하는 것이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신앙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학에 온 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예전보다 대답이 느려졌다.

옆 학생이 발표한다.

“종교도 결국 사람이 해석하는 거잖아요.”

예림의 머릿속에서 반박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게 말하면 모든 게 상대적이잖아.

그런데 바로 이어 다른 생각이 붙는다.

근데 나도 성경을 직접 다 판단하는 건 아니잖아.

그 생각은 조금 불편하다.

노트에 교수의 말을 적는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쓴다.

내가 믿는 것과 내가 배운 것은 얼마나 다른가?

몇 초 후 그 문장을 줄로 지운다.

오전 11시 24분

전공 수업이 끝난 뒤 수민과 카페에 간다.

수민이 지난 주말 소개팅 이야기를 한다.

“괜찮긴 한데 두 번째 볼지는 모르겠어.”

예림이 묻는다.

“왜?”

“그냥 안 끌려.”

“괜찮은 사람이면 한 번 더 봐도 되지 않아?”

수민이 웃는다.

“너는 괜찮은 사람이면 다 사귀냐?”

예림도 웃는다.

“아니, 그건 아니고.”

수민이 갑자기 묻는다.

“근데 너는 연애 안 해?”

“할 사람이 없어.”

“교회에서 소개 안 해줘?”

예림은 종이컵의 빨대를 만진다.

“우리 교회는 그런 거 별로 없어.”

사실 있다.

지난 겨울 어머니가 같은 교회 청년 한 명을 꽤 괜찮게 평가했다.

“민석이 성실하지 않니?”

직접 소개하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예림은 민석이 싫지 않다.

착하고 예의 바르다.

그래서 더 부담스럽다.

만약 자신이 그 사람과 연애한다면 좋아해서인지, 삶 전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다.

오후 1시 17분

도서관에서 과제를 한다.

노트북 옆으로 휴대전화가 진동한다.

교회 청년부 단체방이다.

이번 주 찬양팀 인원이 부족합니다. 가능한 분 알려주세요!

예림은 메시지를 읽는다.

피아노를 칠 줄 알기 때문에 고등학생 때부터 자주 반주했다.

일요일에 내려가면 아마 부탁받을 것이다.

손가락이 답장창 위에 머문다.

이번 주에는 그냥 예배만 보고 싶다.

하지만 ‘못 합니다’라고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잠시 후 메시지를 보낸다.

저 토요일 내려가면 가능해요!

보내자마자 마음이 두 갈래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데 해야지.

다른 한쪽에서는

또 내가 먼저 했네.

예림은 자신이 부탁을 거절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 부탁은 잘 거절한다.

교회에서만 조금 다르다.

오후 3시 46분

철학 동아리 모임이다.

오늘은 자유의지에 대한 짧은 토론을 한다.

동아리 선배 현우가 말한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한다고 해도 사실 어렸을 때 환경 영향이 엄청 큰 거잖아요.”

예림이 묻는다.

“그러면 환경 때문에 믿기 시작한 사람의 믿음은 진짜가 아닌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시작점을 생각해보자는 거지.”

예림은 고개를 끄덕인다.

현우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예림은 현우와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다.

그런데 가끔 집에 내려가면 동아리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싫어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는

“대학 가면 여러 사람 만나봐야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질문을 예림은 예상한다.

“그래도 네 믿음은 흔들리면 안 돼.”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아예 첫 문장을 하지 않는다.

오후 6시 09분

기숙사로 돌아오는 지하철.

예림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밥 먹었어?”

“아직.”

“주말에 몇 시 버스야?”

“아직 안 끊었어.”

“토요일에 오지?”

“응.”

어머니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 주에 이 목사님 설교하셔. 네가 좋아하잖아.”

예림은 대답한다.

“응.”

예전에는 좋아했다.

지금도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설교를 들을 때 내용보다 자신이 동의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어머니가 말한다.

“요즘 기도는 잘하지?”

예림이 잠깐 늦게 대답한다.

“하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잠들기 전에 짧게 기도할 때가 있다.

예전만큼 자주 하지 않을 뿐이다.

어머니가 만족한 듯

“그래.”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통화를 끝낸 뒤 예림은 이상하게 죄책감이 든다.

기도 횟수를 정확하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

오후 7시 31분

기숙사 방에서 컵밥을 먹는다.

룸메이트 지아가 침대에 앉아 인터넷 쇼핑을 한다.

“예림아, 이것 좀 봐봐. 뭐가 나아?”

검은색 재킷과 갈색 재킷이다.

예림이 갈색을 고른다.

지아가 장바구니에 넣다가 말한다.

“아, 맞다. 이번 토요일에 애들이 한강 간다는데 너도 갈래?”

예림은 바로 말한다.

“나 집 가.”

“또?”

“응.”

지아가 별 뜻 없이 말한다.

“너는 서울 와서도 거의 전주 사는 것 같다.”

예림은 웃는다.

“그러게.”

대화는 끝난다.

그런데 그 말이 조금 남는다.

나는 서울에 사는 건가, 학교만 서울에서 다니는 건가.

한강 모임이 특별히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선택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선택지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걸린다.

오후 9시 18분

예림은 동생과 메시지를 한다.

너 요즘 교회 잘 가?

동생이 답한다.

왜 갑자기

그냥

엄마 때문에 감

예림은 한참 화면을 본다.

그러지 말고 니가 알아서 해

라고 썼다가 지운다.

대신 보낸다.

그래도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진 마

동생이 답한다.

누나는 엄마편이네

예림은 순간 기분이 나쁘다.

왜 내가 엄마 편이야.

하지만 바로 답하지 않는다.

조금 전 자신은 동생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하고 싶었다.

결국 어머니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밤 11시 42분

불을 끈 뒤 침대에 누운다.

룸메이트는 이어폰을 끼고 영상을 보고 있다.

예림은 토요일 버스를 예약한다.

오후 2시 출발.

예약을 완료하고 한동안 화면을 본다.

갑자기 다음 주에는 전주에 내려가지 말아볼까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쉬워하겠지만 화내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교회에서도 누군가 대신 피아노를 칠 것이다.

그런데 생각만 해도 조금 불편하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건지, 안 가면 이상해서 가는 건지 모르겠네.

예림은 짧게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잘 생각하게 해주세요.”

말하고 나서 조금 웃는다.

믿음을 의심하는 문제까지 믿고 있는 하나님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자연스럽다.

그녀는 그대로 잠든다.

이 사람의 일생

유년기

서예림은 2004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규모 건축자재 업체의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했다.

경제적으로 아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인 가정이었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있다.

예림의 가족에게 교회는 일요일에만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부모의 친구 상당수가 교회 사람이었고 가족여행 일정도 교회 행사와 겹치지 않게 잡았다.

예림은 다섯 살 때부터 교회 유치부를 다녔다.

그 경험을 억압적이었다고 기억하지 않는다.

친구가 있었고, 간식을 먹었고, 여름성경학교를 기다렸다.

교회는 가족과 공동체와 놀이가 분리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예림은 조용하지만 사람을 아주 어려워하지는 않는 아이였다.

친한 친구 몇 명과 오래 지내는 편이었다.

피아노를 비교적 잘 쳤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반주를 자연스럽게 맡았다.

교회에서는

“예림이는 참 믿음이 좋다.”

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예림에게 당시의 ‘믿음이 좋음’은 복잡한 신학적 신념이 아니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어른 말을 잘 듣고, 찬양할 때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 행동들은 칭찬받았고 자신도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사춘기가 되어도 부모와 큰 충돌은 없었다.

예림은 흔히 말하는 반항적인 청소년이 아니었다.

학교 친구들 중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가정환경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친구가

“나는 종교 없어.”

라고 하면 처음에는 그 말을 ‘아직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 정도로 이해했다.

고등학교에서 생명윤리나 성적 지향 같은 문제를 접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교회에서 들은 설명과 학교 친구들의 경험이 항상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친한 친구 한 명이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예림은 당황했다.

친구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자신이 그 친구를 어떤 언어로 이해해야 하는지만 갑자기 어려워졌다.

그 경험이 예림의 신앙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맞다고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충돌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질문을 처음 만들었다.

대학 진학

서울의 대학에 합격했을 때 가족 모두 기뻐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다.”

고 말했다.

예림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이 열심히 공부한 결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두 설명은 당시에는 충돌하지 않았다.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가족과 교회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졌다.

누가 예배에 갔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밥을 언제 먹든, 주말에 무엇을 하든 자유였다.

처음 몇 달은 오히려 매주 전주에 내려갔다.

익숙한 곳이 편했다.

그런데 학교 친구들과 가까워지고 새로운 수업을 들으면서 질문이 늘었다.

예림에게 변화는

“종교를 버릴 것인가?”

의 형태로 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믿는 것 중 어느 부분을 실제로 내가 선택한 적이 있는가?”

라는 형태로 왔다.

현재

예림은 여전히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기도도 하고 교회에 간다.

신앙을 없애고 싶은 마음도 없다.

동시에 과거처럼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하지 못한다.

부모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단지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부모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큰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예림에게 어려운 것은 부모의 처벌보다 부모가 알고 있는 ‘예림’이라는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두렵다는 사실을 예림은 아직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현재 심리와 일생의 연결

예림의 하루를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신앙을 강요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어머니는 기도했고, 교회에서는 반주자를 찾았고, 가족은 주말에 딸이 오는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예림에게는 그 기대들이 상당한 무게를 갖는다.

왜일까.

예림의 신앙은 개인적인 믿음이 되기 전에 가족관계, 친구, 칭찬, 음악, 주말의 리듬과 함께 만들어진 생활세계였다.

그러므로 신앙에 질문이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오랫동안 사랑해온 사람들과 연결된 언어를 다시 검토하는 일이 된다.

오후에 찬양팀 모집 글을 보자 예림은 스스로 지원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원하고 나서

또 내가 먼저 했네.

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여러 마음이 섞여 있다.

실제로 공동체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다.

피아노를 잘 치고 자신이 맡으면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안다.

동시에 ‘나는 이 공동체의 이런 사람’이라는 기존 역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면도 있다.

다른 관계에서는 부탁을 잘 거절하는 예림이 교회에서만 다르게 행동하는 이유다.

동생과의 대화는 더 복잡하다.

예림은 동생에게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낸 말은

“엄마한테 그렇게 말하진 마.”

였다.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가족의 평화를 보호하려 한다.

동생에게는 그 모습이 ‘엄마 편’으로 보였다.

예림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녀에게 가족의 감정을 고려하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갖는 것은 아직 서로 배타적인 일이 아니다.

문제는 두 가지가 실제로 충돌할 때다.

밤에 예림은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건지, 안 가면 이상해서 가는 건지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람의 선택에서 상당히 어려운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는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느끼는 많은 행동을 사실 오랫동안 반복된 환경 안에서 배운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림은 정말 가족을 사랑한다.

교회 사람들도 좋아한다.

신앙에도 실제 의미를 느낀다.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고 싶다.

이런 상태를 ‘신앙이 약해졌다’거나 ‘독립하지 못했다’는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예림의 실제 경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녀에게 현재 세상은 옳은 답을 찾는 곳에서, 내가 무엇을 근거로 답을 선택하는지 알아가는 곳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그 변화는 완료되지 않았다.

이 사람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기

1. 당신이 평생 당연하다고 믿어온 가치가 사실 가족과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가치는 덜 진짜가 되는 것일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출발점에서 시작했더라도 나중에 다시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2. 가족이 직접 강요하지 않아도 가족의 기대를 어기기 어려울 수 있을까?

사랑받았던 방식 자체가 어떤 선택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당신은 어떻게 볼까?

3. 예림이 계속 교회를 다닌다면 그것은 용기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질문을 품은 채 관계와 믿음을 유지해보려는 선택일 수도 있을까?

사람이 변하려면 반드시 이전 세계와 단절해야 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작은 원룸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서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