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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자료실/인간 심리 관찰

이경재, 59세, 부산의 구청 행정직 5급 과장, 정년퇴직까지 9개월

by 마음 탐구소 2026. 8. 12.

현재의 하루

오전 5시 56분

경재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난다.

평일에는 거의 같은 시간이다.

아내는 계속 자고 있다.

경재는 거실로 나와 물을 한 잔 마시고 혈압을 잰다.

128에 82.

수치를 휴대전화 건강 앱에 입력한다.

그다음 뉴스 앱을 연다.

기사는 여러 개 읽지만 댓글은 거의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말해.”

라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댓글 숫자가 많은 기사는 눌러본다.

오전 6시 42분

아내와 아침을 먹는다.

아내가 말한다.

“다음 주 목요일 병원 가는 거 기억하지?”

“응.”

“또 회의 있다고 미루지 말고.”

“회의 잡히면 어쩔 수 없지.”

아내가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당신 퇴직하면 구청 문 닫아?”

경재가 웃는다.

“내가 언제 그렇게 했다고.”

아내도 웃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경재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놀고 싶어서 야근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조금 뒤에는 자신이 다른 과장보다 야근이 특별히 많은 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오전 7시 51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경재는 앉자마자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일에 빠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오늘 예정된 회의를 머릿속으로 한번 정리한다.

최근 구청에서는 주민센터 업무 일부를 통합하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젊은 직원들은 온라인 민원 시스템을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경재도 방향 자체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다.

시스템 안 되는 날 한 번 터지면 결국 현장에서 다 받는 거야.

30년 넘게 행정을 해온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다.

동시에 자신이 새로운 시스템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하는 부분도 조금 있다.

그 부분은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오전 8시 24분

사무실에 도착한다.

직원 세 명이 먼저 와 있다.

경재가 인사한다.

“일찍 왔네.”

막내 직원이 웃는다.

“과장님이 더 일찍 오셨잖아요.”

경재는 자기 자리로 가다가 탕비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다.

다시 돌아가 끈다.

“이런 거부터 아껴야 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하다.

젊은 직원 한 명이 듣고

“네.”

라고 대답한다.

경재는 잠깐 생각한다.

괜히 잔소리처럼 들렸나.

그러나 다시 켜두지는 않는다.

오전 9시 37분

팀 회의가 시작된다.

주무관 한 명이 새로운 민원 접수 시스템 도입안을 설명한다.

“기존 서면 접수를 온라인 예약으로 바꾸면 대기시간이 많이 줄어듭니다.”

경재가 묻는다.

“고령층은?”

“현장 접수도 일부 남깁니다.”

“일부가 어느 정도인데?”

직원이 자료를 넘긴다.

“일단 20% 정도로…”

경재가 말을 자른다.

“일단이라는 말로 시행하면 안 돼요. 실제로 하루에 몇 명 오는지 조사부터 해야지.”

회의실이 조금 조용해진다.

직원이 말한다.

“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10분 뒤 경재는 다른 의견에는 동의한다.

회의가 끝난 뒤 직원이 자리로 돌아가자 옆자리 동료가 조용히 말한다.

“과장님 질문 세다.”

직원이 웃는다.

“원래 그러시잖아요.”

경재는 듣지 못한다.

오전 10시 52분

결재문서가 올라온다.

지역행사 보조금 관련 문서다.

경재가 금액 하나를 확인하다 전화기를 든다.

“박 주무관, 이 산출근거 어디 있어요?”

직원이 와서 설명한다.

“작년 기준으로 작성했습니다.”

“작년 기준이면 작년 자료를 붙여야지.”

“금액은 똑같습니다.”

“똑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지.”

직원이 말한다.

“네. 첨부하겠습니다.”

경재는 결재를 보류한다.

다섯 분이면 고칠 일이다.

그는 이런 것을 그냥 통과시키는 관리자를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직원들은 자신을

‘틀린 건 아닌데 피곤한 상사’

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안다.

그 평가가 완전히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후 12시 14분

과장 세 명이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 사람이 묻는다.

“이 과장, 이제 몇 달 남았지?”

“9개월.”

“좋겠네.”

경재가 웃는다.

“좋긴 뭐가 좋아.”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데.”

다른 사람이 말한다.

“퇴직하고 뭐 할 건데?”

경재는 된장찌개를 뜨며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해야지.”

모두 웃는다.

그도 웃는다.

사실 몇 달 전부터 퇴직 후 계획을 검색하고 있다.

공인중개사 강의도 알아봤고 행정사 자격도 찾아봤다.

아내는

“또 일하려고?”

라고 했다.

경재는

“그냥 보는 거야.”

라고 대답했다.

오후 1시 46분

민원인이 과장실로 직접 찾아온다.

주차 관련 과태료 문제다.

이미 담당자가 설명했지만 납득하지 못했다.

60대 남성이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거기 5분 댔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경재는 규정을 설명한다.

남자가 말한다.

“그러니까 공무원들이 융통성이 없다는 거예요.”

경재의 표정이 굳는다.

“저희가 임의로 누구는 봐드리고 누구는 부과하면 그게 더 문제가 됩니다.”

남자가 말한다.

“사람 사는 게 규정대로만 됩니까?”

경재가 대답한다.

“그래서 이의신청 절차가 있습니다.”

20분 정도 대화한 뒤 민원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간다.

경재도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순간에 자신의 직업적 논리가 가장 명확해진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워도 규칙은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경재가 오랫동안 믿어온 행정의 기본이다.

오후 3시 03분

막내 직원이 휴가 신청서를 가져온다.

다음 달 평일 세 날을 연달아 쓰는 일정이다.

경재가 묻는다.

“무슨 일 있어요?”

직원이 잠깐 멈춘다.

“여행 가려고요.”

경재도 순간 멈춘다.

예전에는 휴가 사유에 ‘가사’라고 적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직원은 너무 자연스럽게 여행이라고 말한다.

경재가 달력을 본다.

업무상 문제는 없다.

“알겠어요. 다녀와요.”

직원이 나간다.

경재는 생각한다.

세상 좋아졌네.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자신이 젊을 때는 휴가를 연달아 쓰려면 눈치를 많이 봤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 때는 다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그 ‘우리 때’가 더 좋은 방식이었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오후 4시 28분

부구청장이 경재에게 전화한다.

보고자료 표현 한 부분을 수정해달라고 한다.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경재는 전화를 끊은 뒤 문장을 고친다.

팀장이 묻는다.

“그걸 꼭 바꿔야 한대요?”

경재가 말한다.

“위에서 원하는데 해야지.”

팀장이 웃으며 말한다.

“아까 과장님은 근거가 중요하다면서요.”

농담이다.

경재도 웃는다.

“이건 근거 문제가 아니잖아.”

말하고 나서 약간 걸린다.

자신도 조직 안에서 모든 규칙을 같은 강도로 적용하지 않는다.

윗선의 취향에는 상당히 빠르게 적응한다.

그 역시 30년 공직생활 동안 배운 기술이다.

오후 6시 07분

대부분 직원들이 퇴근한다.

경재도 가방을 챙긴다.

막내 직원이 아직 자리에 있다.

“왜 안 가요?”

“아까 자료 다시 하고 있습니다.”

경재가 모니터를 본다.

“내일 해도 되는데.”

직원이 웃는다.

“과장님이 다시 보라고 하셨잖아요.”

경재는 잠깐 할 말이 없다.

“그렇긴 한데 오늘 하라는 건 아니었어요.”

“조금만 하고 갈게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경재는 생각한다.

내가 압박했나.

회의할 때는 업무의 정확성만 생각했다.

그러나 상사가 한 말은 내용뿐 아니라 시간까지 명령처럼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다.

오후 7시 22분

집에서 아내와 저녁을 먹는다.

아내가 말한다.

“오늘 문화센터에서 어떤 분 만났는데 남편이 퇴직하고 맨날 집에 있대.”

경재가 웃는다.

“내 얘기 미리 하는 거야?”

“당신은 집에 못 있어.”

“왜 못 있어?”

“사흘이면 답답하다고 나갈걸.”

경재는 반박한다.

“나도 놀 줄 알아.”

아내가 묻는다.

“그럼 작년에 휴가 때 왜 나한테 일정표 만들라고 했어?”

경재는 웃는다.

“여행은 계획이 있어야지.”

아내도 웃는다.

경재는 자기가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간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오후 9시 14분

거실에서 퇴직연금 예상액을 다시 확인한다.

몇 달 전에도 본 숫자다.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아내가 지나가며 묻는다.

“그걸 또 봐?”

“그냥 확인하는 거지.”

“당신 돈 걱정하는 것도 아니잖아.”

경재는 대답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아주 여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부부가 생활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다.

아파트 대출도 거의 끝났다.

연금액을 확인하는 데에는 돈 이외의 의미도 있다.

‘퇴직 이후’라는 시기를 숫자로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숫자는 예측 가능하다.

자기가 매일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게 될지는 그렇지 않다.

밤 10시 53분

침대에 누운다.

아내는 책을 읽고 있다.

경재가 말한다.

“행정사 시험 그렇게 어렵나?”

아내가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한다.

“안 한다며.”

“한다고 한 적 없어.”

“그러니까 하지 마.”

경재가 웃는다.

“왜.”

아내가 이제 쳐다본다.

“30년 일했으면 됐지.”

경재는 대답한다.

“내가 돈 벌려고 하는 줄 알아?”

아내가 묻는다.

“그럼 왜 하는데?”

경재는 몇 초 동안 말이 없다.

“그냥 뭐라도 알아두면 좋잖아.”

불을 끈다.

경재는 자신이 퇴직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두려운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퇴직이라는 사건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그 다음 날 오전 9시에 나는 어디에 있지?’

라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사람의 일생

유년기

경재는 1967년 부산에서 세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만 관련 업체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가정을 돌봤다.

가족은 아주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규칙이 분명했다.

귀가시간, 용돈, 공부시간 같은 것이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 정한 건 지켜야 한다.”

는 말을 자주 했다.

경재는 비교적 규칙을 잘 따르는 아이였다.

그것이 반드시 순종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규칙이 명확하면 무엇을 하면 혼날지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 편했다.

청소년기

성적은 중상위권이었다.

특별히 두각을 보이는 학생은 아니었다.

학생회 임원을 맡은 적도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아주 즐기지는 않았다.

경재가 잘했던 것은 정리였다.

준비물을 챙기고, 회비를 계산하고, 일정표를 만드는 일을 잘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미있는 친구보다는 믿을 수 있는 친구에 가까웠다.

그는 이 평가에 대체로 만족했다.

20대와 공직 입문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몇 군데 기업 시험에도 응시했지만 결국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처음부터 ‘국가에 봉사해야겠다’는 큰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정된 직업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부모도 좋아했다.

처음 주민센터에서 근무했을 때 그는 규정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빠르게 배웠다.

서류 하나가 부족하다고 돌려보내면 주민은 화를 냈고, 봐주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다.

선배들은

“규정도 알아야 하고 사람도 알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경재는 점차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30대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다.

아내도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육아는 친정과 시댁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경재는 자신이 가족에게 무책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월급을 꼬박 가져왔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자녀들의 학교생활이나 친구관계는 아내가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딸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내가 몇 반인지 알아?”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경재는 알고 있었지만 순간 대답이 늦었다.

딸은 웃었지만 경재에게는 꽤 오래 남았다.

0대와 승진

경재는 크게 튀지 않았지만 평가가 안정적이었다.

결재 실수가 적고 민원을 잘 처리했다.

조직 내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승진하면서 후배들을 평가하는 위치가 되었다.

젊을 때는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속으로 불만을 가졌지만, 자신이 관리자가 된 뒤에는 조직 전체 사정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시야가 넓어진 부분도 있다.

동시에 과거에는 권력이라고 생각했던 행동 중 일부를 이제는

‘관리자의 책임’

이라고 부르게 된 부분도 있다.

경재는 그 차이를 자주 의심하지 않는다.

50대

자녀들은 모두 독립했다.

아들은 수도권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딸은 결혼해 부산 다른 지역에 산다.

부부의 경제상황은 안정적이다.

경재는 5급으로 승진했고 과장이 되었다.

자신이 아주 성공한 공무원이라고 생각하지도,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퇴직을 앞두면서 자신의 생활에서 직장의 비중이 예상보다 컸다는 사실을 조금씩 발견하고 있다.

직장은 돈을 주는 곳만이 아니었다.

매일 만날 사람, 해결할 문제, 자신의 의견이 실제 결정에 반영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가 그것을 ‘권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현재 심리와 일생의 연결

경재를 하루만 관찰하면 규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적인 공무원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런 면이 강하다.

보조금 서류의 작은 근거도 다시 첨부하게 하고, 주차 과태료 민원인에게 특정 사람만 봐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경재에게 공정함은 추상적인 미덕만이 아니다.

30년 넘게 일을 하며 개별 사정에 따라 규칙을 바꾸기 시작하면 결국 더 큰 불공정이 생긴다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그의 규칙 지향에는 현실적 근거가 있다.

그러나 같은 날 부구청장이 보고자료 문장 하나를 바꾸라고 했을 때는 큰 저항 없이 바로 수정했다.

팀원이 농담으로 그 모순을 지적하자 경재는

“그건 근거 문제가 아니잖아.”

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동시에 조직의 위계가 개입하는 순간 자신도 상당히 유연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을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경재 역시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아래쪽에는 엄격하고, 자신보다 위쪽의 결정에는 현실적으로 적응한다.

그것은 비겁함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조직생활에서 실제로 유용했던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력관계가 판단에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막내 직원에게

“내일 해도 되는데.”

라고 말한 장면도 중요하다.

경재는 ‘자료를 다시 확인하라’고만 지시했다고 생각했다.

직원에게는 과장의 말 자체가 일정이 되었다.

경재는 자신이 가진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항상 체감하지 못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에게 권력은 종종 그냥 일이 진행되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반면 상대에게는 훨씬 크게 느껴진다.

퇴직이 경재에게 불편한 이유에도 이 문제가 일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높은 지위를 잃기 싫어서 퇴직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것만이 이유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질문하면 사람들이 대답하고, 문서에 의견을 쓰면 수정되고, 일정이 정해져 있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다.

퇴직 다음 날부터는 그 구조가 대부분 사라진다.

그래서 연금액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자격증을 검색한다.

겉으로는 경제계획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다시 일정과 자격으로 조직하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아내에게

“나도 놀 줄 알아.”

라고 말하지만 여행에서도 일정표를 만든다.

경재는 자유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자유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

보다

‘내가 정할 수 있는 상태’

에 가깝다.

그가 은퇴 후 정말 행정사 일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몇 달 놀다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경재 자신도 아직 모른다.

그에게 가장 낯선 것은 일을 그만두는 것 자체보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당연했던 역할·규칙·권한 없이도 하루가 정상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기

1. 경재 같은 상사를 만난다면 당신은 그를 원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같은 행동도 민원인의 위치, 부하 직원의 위치, 조직 전체를 책임지는 위치에서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2.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얼마나 정확하게 느낄 수 있을까?

경재에게는 평범한 업무 지시 한마디가 직원에게는 사실상 명령이 되는 것처럼, 당신 역시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3. 30년 동안 직업이 하루의 시간표와 인간관계, 사회적 역할을 제공했다면 퇴직은 단순히 ‘이제 쉬는 것’일까?

당신이라면 경제적으로 충분하다는 이유만으로 다음 날부터 아무 역할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정년퇴직을 앞두고 구청 사무실에서 업무자료를 검토하는 이경재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