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남들이 말하는 책임 있는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
기본 정보
| 이름 | 박재민 |
| 나이 | 39세 |
| 성별 | 남성 |
| 거주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 출신 | 대전 |
| 직업 | 게스트하우스 야간관리·카페 아르바이트 |
| 과거 직업 | 중견 전자부품회사 해외영업 |
| 학력 | 수도권 4년제 대학 경영학과 졸업 |
| 월소득 | 약 190~230만 원 |
| 자산 | 예금 약 3,600만 원, 10년 된 경차 |
| 부채 | 없음 |
| 주거 | 보증금 500만 원, 월세 45만 원 원룸 |
| 가족 | 부모·누나 1명, 모두 대전 거주 |
| 결혼 | 미혼, 4년 전 파혼 경험 |
| 가장 큰 고민 | 지금의 삶이 자유인지 회피인지 판단하기 어려움 |
재민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일어난다.
커피를 내려 마시고 바다가 보이는 길을 30분 정도 걷는다.
오후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게스트하우스 야간관리를 한다.
휴일에는 낚시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보다 소득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대신 야근도, 실적회의도, 출근길 지하철도 없다.
친구들은 그의 삶을 두 가지 방식으로 평가한다.
“부럽다.”
또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재민 자신도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른다.
1. 어린 시절 — 모범적인 집의 둘째
재민은 1987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공기업 직원,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하지 않은 가정이었다.
부모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누나는 공부를 매우 잘했다.
명문대에 진학했고 현재는 약사다.
재민 역시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항상 누나보다 조금 부족했다.
부모가 노골적으로 비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명절마다 말했다.
“누나처럼 공부해야지.”
재민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이해했다.
좋은 대학 → 좋은 회사 → 결혼 → 안정적인 가정.
그는 그 경로에 특별한 반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충실하게 따라갔다.
2. 대학에서 처음 경험한 다른 세계
20세에 수도권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생이 된 재민은 여행 동아리에 들어갔다.
방학이면 배낭을 메고 돌아다녔다.
태국, 베트남, 인도에도 갔다.
돈이 부족하면 저렴한 숙소에서 자고 야간버스를 탔다.
그때 재민은 처음으로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 가운데 상당수는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기차를 놓쳐 이름도 몰랐던 도시에 하루 더 머물렀던 일.
숙소에서 만난 사람과 밤새 이야기했던 일.
목적 없이 낯선 골목을 돌아다녔던 일.
하지만 여행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경로로 돌아왔다.
여행은 삶이 아니라 삶에서 잠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3. 회사원이 되다
군 복무와 대학 졸업 후 중견 전자부품회사 해외영업팀에 입사했다.
영어를 잘했고 사람들과도 무난하게 지냈다.
업무능력도 좋은 편이었다.
입사 6년 차에는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다.
연봉은 5,000만 원을 넘어갔다.
출장도 자주 다녔다.
부모는 만족했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잘 풀린 인생이었다.
재민 역시 당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의 인생이 계속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사실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4. 결혼을 준비하면서 생긴 균열
31세에 회사 동료의 소개로 은지를 만났다.
은지는 공무원이었다.
두 사람은 성격도 잘 맞았고 3년 동안 연애했다.
결혼을 결정했다.
신혼집을 알아보고 양가 부모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결혼 준비가 구체화될수록 재민에게 이상한 불안이 생겼다.
아파트 대출.
자동차.
승진.
자녀 계획.
교육비.
노후 준비.
각각은 합리적인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연결되는 순간 재민에게는 앞으로 30년의 삶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은지가 말했다.
“아이 생기기 전에 조금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는 게 좋지 않을까?”
재민은 갑자기 대답했다.
“나는 애를 꼭 낳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처음 나온 이야기였다.
갈등이 시작됐다.
5. 파혼
두 사람은 몇 달 동안 대화했다.
결국 결혼을 취소했다.
은지가 일방적으로 결혼을 강요한 것도 아니었고 재민이 결혼 자체를 싫어했던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재민이 자신의 생각을 너무 늦게 드러냈다는 데 있었다.
은지는 마지막에 말했다.
“당신은 나랑 결혼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어떤 선택도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게 싫었던 것 같아.”
재민은 그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오래 기억했다.
파혼 후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서로 원하는 삶이 달랐어.”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한 설명도 아니었다.
6. 퇴사
파혼 1년 뒤 회사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나타났다.
부장 승진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재민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당시 그의 통장에는 약 9,000만 원이 있었다.
결국 10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퇴사했다.
부모는 크게 반대했다.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서 뭘 할 건데?”
재민은 대답했다.
“좀 쉬면서 생각해보려고.”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재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7. 제주도
처음에는 제주에서 세 달만 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일을 했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
카페 직원.
여행 영상 촬영 보조.
렌터카 회사 단기직.
귤 수확 아르바이트.
그는 이전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번다.
하지만 생활비도 적다.
명품이나 자동차에 관심이 없고 술도 많이 마시지 않는다.
현재 가진 돈으로 몇 년은 버틸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이 경제적으로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8. 부모와의 갈등
아버지는 재민의 생활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네가 스무 살이면 모르겠다. 마흔 다 됐잖아.”
어머니는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건강만 해라.”
재민은 그 말이 오히려 더 불편하다.
부모가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절에 누나 가족을 만나면 그 감각은 더 강해진다.
누나는 결혼했고 두 아이가 있다.
아파트가 있다.
약국도 운영한다.
가족사진을 찍으면 재민은 자연스럽게 가장자리에 선다.
아무도 그를 제외하지 않는다.
그런데 스스로 조금씩 가족의 본편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느낀다.
9. 새로운 관계
1년 전 제주에서 지수라는 34세 여성을 만났다.
지수는 프리랜서 번역가다.
두 사람은 현재 연애 중이다.
재민은 지수와 함께 있을 때 편하다.
결혼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지수가 말했다.
“나는 결혼은 꼭 안 해도 되는데 언젠가는 같이 살고 싶어.”
재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결혼도 아니고 아이를 갖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서 경계심이 올라왔다.
같이 산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날 이후 재민은 자신에게 조금 불편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인 것은 아닐까?
10. 돈과 시간
재민은 과거 회사에서 벌었던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지난 4년 동안 사용했다.
9,000만 원이던 금융자산은 약 3,600만 원으로 줄었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잔액이 4,000만 원 아래로 내려가면서 은행 앱을 자주 확인하기 시작했다.
39세.
국민연금 가입기간도 충분하지 않다.
현재 소득으로는 저축하기 어렵다.
부모에게 재산이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노후계획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처음으로 자유의 경제적 가격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11. 성격의 모순
재민은 계획적인 사람인데 계획된 인생을 싫어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깊은 관계가 자신을 구속할 가능성에는 민감하다.
경제관념이 있지만 장기적인 경제계획은 미룬다.
부모의 기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부모의 인정에 여전히 영향을 받는다.
안정적인 직장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통장잔액이 줄어드는 것은 불안하다.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명절에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 공허함을 느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모순은 이것이다.
재민은 선택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선택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다.
12.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과 정당화하는 것
재민이 파혼 직전에 자신의 불안을 드러낸 것은 그의 성장환경과 삶의 방식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정해진 경로를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의 선택이 실제로 자신의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혼을 준비하던 상대에게 중요한 가치관을 늦게 이야기한 행동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부모의 걱정을 모두 시대착오적인 간섭이라고 치부하거나, 연인과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은 채 관계의 편안함만 누린다면 다른 사람에게 선택의 비용을 떠넘기는 일이 될 수 있다.
자유를 원하는 것과 자신의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자유로운 것은 다른 문제다.
13. 최근 생긴 제안
얼마 전 과거 직장 동료에게 전화가 왔다.
동료는 작은 무역회사를 창업했다.
재민에게 제주에서 원격으로 해외영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주 4일.
대부분 재택근무.
연봉 4,200만 원.
재민의 경력을 생각하면 아주 높은 급여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 수입의 거의 두 배다.
서울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예전처럼 회사에 모든 시간을 바칠 필요도 없다.
과거의 재민이었다면 회사냐 자유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번 제안은 조금 다르다.
두 가지를 어느 정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재민은 처음으로 자신의 문제가 직장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재민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20대의 재민에게 세상은 정답이 있는 곳이었다.
공부하고, 취업하고, 승진하고, 결혼하면 된다.
30대 초반에는 그 정답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정답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상당히 행복했다.
하지만 39세가 된 지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 동안에도 경력은 변한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동안에도 관계는 변한다.
돈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지 않아도 통장잔액은 줄어든다.
시간 역시 지나간다.
며칠 전 재민은 바닷가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날씨 이야기, 어머니 건강 이야기, 누나 아이들 이야기.
전화를 끊기 직전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서 너는 요즘 괜찮냐?”
평소 같으면 재민은 말했다.
“응. 나 잘 지내.”
이번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잘 지내기는 하는데, 이제 뭘 좀 선택해야 할 것 같아.”
아버지는 의외로 아무런 충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재민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남들이 정한 인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제 처음으로 무엇에서 도망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감수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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