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하루
오전 4시 52분
수진은 휴대전화 진동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눈을 뜬다.
원룸보다 조금 큰 12평짜리 빌라.
방 하나는 수진이 쓰고 작은 방에는 초등학교 3학년 아들 윤재의 침대가 있다.
오늘 윤재는 없다.
이번 주 평일은 전남편 집에서 지낸다.
수진은 빈 방문을 한번 보고 욕실로 간다.
세수를 하고 작업복 안에 입을 검은 티셔츠를 꺼낸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다가 눈썹이 한쪽만 흐린 것을 발견한다.
잠깐 고민하다 다시 그린다.
병원에서 마스크를 쓰면 얼굴 대부분이 가려진다.
그래도 눈썹은 그린다.
내가 보려고 하는 거지.
전자레인지에 어제 남은 밥을 데운다.
김에 밥을 싸 먹으면서 휴대전화로 통장 잔액을 확인한다.
월급날까지 8일.
잔액 38만6천 원.
교통비와 보험료가 빠져나가도 큰 문제는 없다.
윤재 생일 선물로 사주기로 한 운동화가 생각난다.
13만 원.
수진은 쇼핑앱을 열어 운동화를 다시 본다.
“애 신발이 왜 이렇게 비싸.”
말하면서도 장바구니에서는 빼지 않는다.
오전 5시 37분
버스정류장.
아직 어둡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박정아가 온다.
정아가 말한다.
“오늘 왜 이렇게 춥냐.”
수진이 웃는다.
“언니는 맨날 추워.”
“늙어서 그래.”
두 사람은 거의 매일 같은 버스를 탄다.
버스가 오자 정아가 먼저 탄다.
수진은 교통카드를 찍으며 기사에게 작게
“안녕하세요.”
라고 한다.
기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수진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이 인사했는데 상대가 듣지 못한 것인지, 들었는데 안 한 것인지는 잠깐 구분한다.
사소한 차이다.
수진은 이런 것을 자주 알아차린다.
오전 6시 11분
병원 지하 직원 탈의실.
미화원 여섯 명이 옷을 갈아입는다.
오늘 수진 담당은 8층 내과병동이다.
반장이 말한다.
“8층 오늘 퇴원 많대. 병실 빨리 돌아가야 된대.”
수진이 묻는다.
“몇 개요?”
“아직 몰라. 간호사실에서 연락 온대.”
수진은 카트를 확인한다.
걸레.
소독제.
비닐장갑.
휴지.
쓰레기봉투.
수진은 청소용 천의 색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화장실용과 일반 표면용을 섞는 것을 싫어한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가끔 그냥 보이는 것을 집으면 바로 말한다.
“그거 화장실 거예요.”
상대가
“어차피 세탁하는데요.”
라고 하면 수진은 짜증이 난다.
어차피 세탁한다는 것과 지금 섞어도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전 6시 43분
첫 번째 병실.
네 명의 환자가 자고 있다.
수진은 문을 최대한 조용히 연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바닥을 닦는다.
한 보호자가 잠에서 깨서 말한다.
“아직 사람 자는데 꼭 지금 해야 돼요?”
수진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조용히 할게요.”
보호자가 다시 몸을 돌린다.
수진은 아무 말 없이 일을 계속한다.
속으로는 생각한다.
내가 시간 정했나.
병동 청소 시간은 정해져 있다.
수진에게 선택권이 없다.
하지만 그 설명을 해봐야 보호자에게는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 말하지 않는다.
바닥을 닦으면서도 걸레가 침대 바퀴에 닿지 않게 방향을 바꾼다.
화를 내면서 일을 대충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전 8시 02분
퇴원한 병실을 청소한다.
침구가 치워진 침대 옆 협탁에 귤껍질이 말라붙어 있다.
서랍을 열자 약 봉투와 영수증, 사용한 물티슈가 나온다.
수진은 장갑을 바꾸고 하나씩 버린다.
문밖에서 젊은 간호사가 말한다.
“선생님, 이 방 조금만 빨리 부탁드릴게요. 입원 환자 올라온대요.”
수진이 말한다.
“네.”
간호사는 바로 사라진다.
수진은 속도를 높인다.
침대 난간을 닦고 협탁을 닦고 화장실을 확인한다.
7분 뒤 간호사가 다시 온다.
“아직 조금 남았어요?”
수진이 고개를 들고 말한다.
“화장실 남았어요.”
“환자 곧 온다 해서요.”
“안 닦고 받으실 거 아니면 조금 기다려야죠.”
말투가 생각보다 딱딱하게 나왔다.
간호사가 잠깐 멈춘다.
“아… 네.”
수진은 화장실로 들어간다.
조금 미안하다.
간호사도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빨리’라는 말을 두 번 들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상한다.
마치 자신의 일은 정확성보다 속도만 중요한 일처럼 느껴진다.
오전 9시 36분
휴게실에서 15분 쉰다.
정아가 믹스커피를 타준다.
“너 아들 이번 주에 없지?”
“응. 금요일에 와.”
“좋겠다. 자유네.”
수진이 웃는다.
“뭐가 자유야.”
“애 없으면 편하지.”
“편하긴 하지.”
수진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번 주에는 저녁밥도 대충 먹고 집도 조용하다.
그런데 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TV부터 켠다.
소리가 필요하다.
정아가 말한다.
“나는 애들 다 키워놓으니까 세상 편하다.”
수진이 묻는다.
“근데 언니는 맨날 손주 보러 가잖아.”
정아가 웃는다.
“그건 또 가야 돼.”
둘이 웃는다.
수진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다를 때 그것을 꽤 재미있어한다.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오전 11시 18분
병실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오는데 환자 한 명이 수진에게 묻는다.
“여사님, 물 한 컵만 갖다줄래요?”
수진이 잠시 멈춘다.
정수기는 복도 끝에 있다.
자기 업무는 아니다.
“제가 간호사 선생님 불러드릴게요.”
환자가 말한다.
“그냥 물만 갖다주면 되는데.”
수진은 순간 불편해진다.
물을 가져다주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여사님’이라고 부르며 너무 자연스럽게 부탁하는 방식이 마음에 걸린다.
수진은 결국 물을 가져다준다.
“여기요.”
“고마워요.”
환자가 웃는다.
수진도 웃는다.
카트를 밀고 나오면서 생각한다.
그냥 가져다주면 되는 걸 괜히 기분 나빠했네.
그리고 곧 다른 생각을 한다.
근데 왜 나한테 시켜.
두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함께 남는다.
오후 12시 14분
구내식당.
오늘 메뉴는 제육볶음과 콩나물국이다.
수진과 미화원들이 한쪽 테이블에 앉는다.
옆 테이블에는 간호사들이 있다.
누가 정한 자리는 아니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앉게 됐다.
정아가 간호사 한 명을 보며 작게 말한다.
“아까 저 사람 나한테 쓰레기봉투 바꿔달라면서 말도 안 쳐다보고 하더라.”
다른 직원이 말한다.
“바빠서 그렇겠지.”
정아가 대답한다.
“바쁘면 사람 안 보고 말해도 되나.”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까 자신도 보호자에게 속으로 짜증을 냈다.
간호사들도 하루 종일 환자와 보호자에게 똑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그 생각은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정아의 서운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수진은 누가 옳은지 고르는 대신 밥을 먹는다.
오후 2시 03분
병실 복도를 닦는데 관리팀 직원 두 명이 지나간다.
한 명이 젖은 바닥 표시판을 피해 돌아간다.
다른 한 명은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신발 자국이 남는다.
수진은 걸음을 멈춘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수진은 한동안 자국을 본다.
화를 낼 정도의 일은 아니다.
걸레를 다시 밀면 된다.
그러나 그 한 번이 이상하게 피곤하다.
내가 닦는 건 보이긴 하나.
다시 닦는다.
몇 분 뒤 자신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청소 중인 다른 미화원의 젖은 바닥을 밟고 지나갈 뻔한다.
멈춰서 옆으로 돌아간다.
조금 전 일이 생각나서다.
오후 3시 27분
전남편 재호에게 메시지가 온다.
윤재 운동화 이거 사달래.
사진이 온다.
수진이 아침에 보던 것과 같은 모델이다.
수진은 답한다.
내가 사려고 했어.
재호가
반반 할까?
라고 보낸다.
수진은 바로
됐어 내가 생일선물로 살게.
라고 한다.
5분 뒤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13만 원.
반씩 하면 6만5천 원이다.
그런데 이미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왜 굳이 혼자 사고 싶은지는 명확하지 않다.
윤재가 신발을 신을 때
‘엄마가 사준 것’
이라고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 있다.
양육비 계산과는 다른 영역처럼 만들고 싶다.
오후 4시 51분
퇴근 준비.
반장이 말한다.
“수진 씨, 내일 7층 좀 봐줘.”
“왜요?”
“거기 담당이 병원 간대.”
“네.”
수진은 특별히 불평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자신의 자리를 대신해준 적이 많다.
탈의실에서 작업복을 벗는다.
손목에 소독제 냄새가 남아 있다.
비누로 두 번 씻는다.
거울을 본다.
아침에 그린 눈썹이 한쪽 지워져 있다.
웃음이 난다.
“뭘 그렸냐.”
그래도 내일 다시 그릴 것이다.
오후 6시 03분
집 근처 마트.
수진은 계란, 두부, 맥주 한 캔을 산다.
운동화 매장을 지나가다가 잠깐 멈춘다.
인터넷보다 8천 원 비싸다.
직원이 말한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수진이 모델명을 말한다.
사이즈를 확인한다.
직원이
“요즘 초등학생들이 이거 많이 신어요.”
라고 한다.
수진은 웃는다.
“그래서 사달라 하나 보네요.”
결국 매장에서 산다.
인터넷이 더 싸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원이 쇼핑백을 건네자 만족스럽다.
실물을 직접 들고 집에 가고 싶었다.
오후 7시 21분
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인다.
혼자 먹을 거라 두부를 대충 잘라 넣는다.
윤재가 있을 때는 모양을 조금 더 작게 자른다.
전남편에게 영상통화가 온다.
윤재 얼굴이 나온다.
“엄마.”
“어.”
“내 신발 샀어?”
수진이 웃는다.
“왜 물어봐.”
“아빠가 말했어.”
수진의 눈썹이 잠깐 올라간다.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
“샀어.”
“진짜?”
“응.”
“고마워.”
윤재는 10초 뒤 게임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발 이야기는 끝이다.
수진은 조금 허무하다.
자신은 하루 동안 가격을 보고, 매장을 들르고, 혼자 사고 싶다는 이유까지 만들었는데 아이에게는 그저 새 신발이다.
그 사실이 섭섭하면서도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오후 9시 04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드라마를 본다.
전남편의 SNS 사진이 우연히 뜬다.
윤재와 놀이공원에 간 사진이다.
수진은 사진을 자세히 본다.
둘 다 웃고 있다.
질투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다르다.
재호와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자신이 없는 가족 장면을 보면 잠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윤재가 자기 없이도 잘 지내는 것이 다행이다.
그리고 조금 서운하다.
둘 다 가능하다.
밤 10시 46분
침대에 눕는다.
내일 7층 청소 순서를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왜 굳이 퇴근하고 일을 생각하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잠시 후 오늘 복도에 남았던 신발 자국이 떠오른다.
별것 아닌 일이다.
그런데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다.
수진은 자신이 청소 일을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직업을 물으면 그냥
“병원에서 청소해요.”
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런 거창한 단어보다 더 단순하다.
자기가 한 일을 다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망가뜨리는 것이 싫다.
그 정도다.
잠들기 전 윤재 운동화가 현관에 잘 놓여 있는지 한번 확인한다.
이 사람의 일생
유년기
수진은 1992년 인천에서 세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식당과 청소 일을 오랫동안 했다.
가족 수입은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심각한 빈곤 상태는 아니었다.
수진은 어머니가 다른 집이나 건물을 청소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퇴근하면
“엄마, 배고파.”
부터 말했다.
어머니도 특별히 자신이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집에서 누가 어질러놓으면 유난히 화를 냈다.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
수진은 그 말을 잔소리라고 생각했다.
청소년기
공부는 평균 정도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특별히 소심한 편도 아니었다.
친구 중 부모 직업이나 아파트 평수로 사람을 평가하는 아이가 있으면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브랜드 신발을 못 살 때는 신경이 쓰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부모 직업을 이야기할 때 어머니가 청소 일을 한다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누가 직접 물으면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는 이것을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좀 다르게 이해하게 됐다.
자신은 어머니가 부끄러운 것보다 다른 사람이 그 정보 하나로 어머니 전체를 판단할까 봐 먼저 긴장했던 것에 가까웠다.
20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
의류매장, 콜센터, 식당을 거쳤다.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틴 편은 아니었다.
23세에 친구 소개로 재호를 만났다.
재호는 자동차 부품회사 생산직이었다.
둘은 3년 연애 후 결혼했다.
윤재가 태어난 뒤 수진은 일을 잠시 쉬었다.
육아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남편 수입에만 의존하는 생활이 예상보다 불편했다.
재호가 돈을 통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필요한 거 사.”
라고 했다.
그러나 수진은 자기 통장에 자기 월급이 없는 상태가 싫었다.
병원 미화 일을 시작하다
윤재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을 찾았다.
처음에는 병원 청소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가 오래 했던 일이어서 오히려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근무시간이 육아와 비교적 잘 맞았고 4대 보험도 됐다.
몇 달만 하려다가 지금까지 7년째다.
처음에는 환자와 보호자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아줌마.”
“여사님.”
“여기 좀 닦아.”
같은 말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 부분 무뎌졌다.
그와 동시에 일이 얼마나 세밀한지도 알게 됐다.
감염 위험.
오염 구역.
청소 순서.
퇴원 병실 회전.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걸레질이지만 실제로는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을 익히면서 직업에 대한 감정도 달라졌다.
결혼생활과 이혼
수진과 재호는 큰 사건 하나 때문에 이혼하지 않았다.
돈 문제, 육아 분담, 시댁 문제, 서로 다른 생활습관이 몇 년 동안 겹쳤다.
재호는 야간근무가 많았고 수진은 자신이 사실상 혼자 아이를 키운다고 느꼈다.
재호는 자신 역시 가족을 위해 일하는데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같은 가정에서 서로 자신이 더 많이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길었다.
윤재가 여섯 살 때 이혼했다.
초기에는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공동양육 방식이 안정됐다.
현재는 윤재가 두 집을 오간다.
수진은 이것이 아이에게 최선인지 가끔 고민하지만, 적어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좋게 본다.
현재
수진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다.
월급과 양육비를 합치면 기본생활은 가능하고 작은 저축도 한다.
비싼 소비를 자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윤재에게 특정한 것을 사줄 때는 평소보다 쉽게 돈을 쓴다.
자기 인생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도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습관이 별로 없다.
다만 누군가 자신의 일을 하찮게 대하는 순간에는 예상보다 빠르게 방어적인 태도가 나온다.
그 이유를 자신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현재 심리와 일생의 연결
수진에게 중요한 심리는 단순히 직업에 대한 열등감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녀가 가장 민감한 것은 사람들 사이의 존엄의 미세한 차이다.
병실에서 환자가
“여사님, 물 한 컵만.”
이라고 했을 때 수진은 물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실제로 가져다줬다.
문제는 물이 아니다.
자신에게 부탁하는 방식 속에서 상대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추측한다.
미화원이니 잡일을 부탁해도 되는 사람인가.
그저 가까이 있는 직원에게 부탁한 것인가.
수진도 답을 모른다.
그래서 물을 가져다주면서도 기분이 나쁘고, 기분 나빠한 자신이 속 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경험은 수진의 어린 시절과도 연결된다.
어머니의 직업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머니를 어떻게 평가할지 먼저 예상했다.
현재 수진 역시 자신의 직업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직업 자체보다 직업을 통해 사람이 축소되는 순간이다.
간호사가
“빨리 부탁드린다.”
고 했을 때 딱딱하게 반응한 이유도 같다.
청소는 빨리 끝내기만 하면 되는 단순 작업이 아니라 정확하게 완료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다만 여기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수진 역시 다른 사람의 노동을 항상 똑같이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화가 나면 경비원이나 판매직원에게 무심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오늘 복도에서 다른 사람이 남긴 발자국 때문에 짜증을 느낀 뒤에야 자신도 다른 미화원이 닦는 바닥을 의식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불편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보는 눈을 잠깐 바꾼 것이다.
아들의 운동화를 혼자 사고 싶었던 행동에는 또 다른 심리가 있다.
공동양육을 하는 부모에게 아이를 위한 비용은 계속 나눠진다.
학원비.
옷.
병원비.
그러다 보면 부모 역할이 항목별 계산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수진은 생일선물만큼은 계산 밖에 두고 싶었다.
‘엄마가 사준 것’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런데 윤재에게는 그런 의미가 거의 없었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신발이었다.
이 장면에서 수진은 약간 서운했지만 동시에 아이에게 자신의 감정적 투자를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다.
밤에 전남편과 윤재의 놀이공원 사진을 보면서 느낀 감정도 비슷하다.
수진은 재호와 재결합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들이 아빠와 잘 지내는 것도 좋다.
그런데 자신이 없는 장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조금 서운하다.
부모에게는 사랑하는 아이가 자신 없이 행복한 것이 성공인 동시에 작은 상실이 될 수 있다.
수진에게 세상은 거대한 계급구조로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1초, 부탁할 때 사용하는 말투, 누가 한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작은 행동들 속에서 서로의 위치가 계속 드러나는 곳에 가깝다.
그래서 그녀는 사소한 것을 오래 기억한다.
이 사람의 시선으로 생각해보기
1. 누군가 단순한 부탁 하나에 예상보다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정말 그 한마디 때문일까?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온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말투도 다른 의미로 들릴 수 있지 않을까?
2.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직업으로 평가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서로 모순일까?
당신도 자신의 직업·학력·소득 중 하나만으로 설명된다면 비슷하게 불편하지 않을까?
3. 아이가 다른 부모와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기쁘면서 서운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나 없이도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사람에게 여전히 특별하고 싶은 마음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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